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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May 22. 2023

올챙이 적 생각하기

감사하고 만족하며 노력하기

2023년 5월 20일 토요일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 토요일에도 5킬로미터 레이스가 있었다.

매년 5월 이맘때쯤 열리는 MVA (Marianas Visitors Authority) 주최 'Tourism Month 5K Run'.

순수하게 달리기 기록으로 승부를 가리는 부문과, 여행과 관련된 코스튬 콘테스트 경쟁 부문으로 나눠진 이 대회는, 관광산업이 섬 경제의 주축을 담당하는 사이판에서 꽤나 중요한 이벤트인지라 가끔은 주지사를 비롯한 정부 인사들도 함께 참여해서 행사 분위기를 북돋우며 관계자들을 독려하곤 한다.


대회 시작 한 시간 전에 도착해 웜업으로 10분 정도 행사장 주변을 달리며 몸을 푼 후, 각자 개성 있고 재밌는 코스튬을 차려입은 참가자들을 구경하며 인사를 나눴다. 각 부문의 1등부터 3등까지 제법 큰 액수의 상금이 걸려있어서 그런지, 코스튬에 진심으로 공을 들인 참가자들의 노력과 성의가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보였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달리기 경쟁 부문에 참가한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금에 욕심을 내며

내심, 이번 대회에는 나보다 빠른 여자부 경쟁자들이 참가하지 않기를 은근히 바랬었지만

역시나...

그동안 다른 자잘한 대회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던 고수들이 이번에는 상금을 챙기러 나왔다는 듯 여유 있는 모습으로 하나둘씩 등장했다.


대회에 나왔다 하면 무조건 압도적인 기록으로 1등을 독차지하는 37세의 미국인 여의사이자 철인 3종 경기 챔피언이기도 한 닥터 Lilly는 다행히도 이번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지만, 왕년의 일본 여자 국가대표 육상 선수 출신에 현재는 사이판 중 고등부 육상 코치로 활동 중인 50대 초반의 아줌마 아키코가 위풍당당하게 나타났으며, 아키코와 늘 선두 자리를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비슷한 연배의 일본인 아줌마 노리코의 모습도 보였다.

'젠장, 오늘은 1~2위 하긴 글렀군.'


그렇다면 뭐, 아쉬운 대로 3위라도 노려보자 마음먹으며 열심히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데, 작년 여름에 미국에서 사이판으로 이주해 온 Taflinger 가족이 저 멀리서부터 등장했다.


사이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이 부부에게는 큰 아들과 두 딸, 이렇게 세 자녀가 있다.

유전자의 힘인지, 다섯 명의 가족 구성원 모두가 달리기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각종 대회가 열릴 때마다 온 식구가 열심히 참가하곤 하는데, 아빠와 15살짜리 아들은 어차피 남자 선수들과 경쟁하니 상관없지만,

아직 어리긴 해도 꽤 빠른 스피드와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유소년 축구팀에서 공격수로도 맹활약 중인 둘째, 13살 딸내미는 나를 능가하고도 남을 만큼 위협적인 실력자였으니...

3위 자리라도 지켜내고 싶었던 나의 야무진 바람에 적신호가 켜졌다.

'아, 오늘 여러 가지로 안 도와주는 날이네.'


한동안 잠잠하던 갱년기 불면증이 하필 대회 전날 밤 다시 도지는 바람에 밤새 거의 한 시간도 자지 못하고

그로 인해 머리가 띵하고 멍하다 못해 어질거리는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죽기 살기로 뛰어 보겠다 마음먹은 방년 50세 아줌마의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출발 신호가 떨어지고 늘 그렇듯, 초반 오버 페이스를 조심하면서 어쨌든 최선을 다해 달렸다.

두 일본 아줌마들은 진작에 내 시야에서 총총히 사라져 갔고, 이미 아침 7시가 넘어 뜨거운 햇살이 이글거리는 주로에는 13살 소녀와 50세 아줌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치열하게 달리고 있었다.

약 2킬로미터 지점까지는 그래도 서로 엇비슷하게 달릴 수 있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확연히 실력과 체력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헉헉대며, 이미 지쳤다는 티를 팍팍 내는 나와 달리 여전히 기운 팔팔해 보이는 13살 소녀는, 발바닥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통통 거리며 쌩하니 나를 앞질러갔다.

사력을 다해 어떻게든 따라잡아 추월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다리와 점점 더 벌어지는 소녀와의 거리가 그것이 결국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 줬다.





아이고 배야~~ 웃겨 죽겄네!
쟤는 지금 뛰는 거여, 아님 걷는 거여?
설마, 기어가는 건가?


알록달록 만국기가, 높고 파란 하늘 위로 펄럭이는 작은 시골 마을의 아담하고 소박한 학교 운동장에서는

가을맞이 운동회가 한창이었고 흥겨운 마을 잔치가 돼버린 이 행사에는, 아이들보다 더 신이 난 어른들이 운동장 주변을 빙 둘러싸고 앉아, 신나게 먹고 마시며 아이들의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아직 삐약삐약 병아리 티를 벗지 못한 국민학교 1학년 학생들의 달리기 경주.(그 시절엔 국민학교였다)

서울에서 전학 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 또래 친구들보다 유난히 하얀 얼굴인 8살 소녀는 청팀을 상징하는 파란색 머리띠를 두르고 긴장된 표정으로 출발선에 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 아직 한 번도 달리기 경주라는 걸 해보지 않았던 소녀인지라 피니쉬 라인이 보이는 저 멀리까지 굳이 달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선뜻 납득하기 힘들었고 골인 지점이 천리길 보다도 멀어 보이기만 했다.


돌아라 돌아!
이 녀석, 지금 뭐 하고 있어!
너 때문에 지금, 뒤에 주자들이 다들 기다리고 있잖아!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에 혼비백산해서 겁을 먹은 소녀는,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친구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는 걸 지켜보며 멍하니 출발선에 서 있다가 뒤늦게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다해 분명히 달리고 있었지만

운동장을 가득 메운 아저씨와 아줌마들은, 소녀의 뒤뚱뒤뚱 느릿느릿 달리는 폼을 보며 박장대소를 하며 외쳤다.

"돌아라 돌아! 빨리 돌아라!"

빨리 달리라는 사투리였지만, 소녀는 왜 사람들이 모두 자기에게 돌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급기야, 보다 못해 속이 터진 선생님까지 달려와 소녀에게 빨리 달리라고 재촉을 했다.


그때까지 운동장 한편에서 한 마리의 작은 거북이처럼 열심히 달리고 있던 소녀는, 선생님의 채근에 그제야 문득 뒤를 돌아보았고, 출발선에는 이제나 저제나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의 지루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같이 출발한 친구들이 이미 골인하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까지 여전히 혼자서 운동장을 돌고 있던 소녀는

출발을 기다리는 다음 주자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선생님의 사인에

출발선에서 땅! 하는 총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고, 우다다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음 주자였던 친구들이 소녀를 추월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걸 본 사람들은 세상 그 어떤 코미디 프로보다 더 재밌다는 반응으로 소녀를 가리키며 웃어댔고 소녀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했다.

'다시는 달리지 않을 거야.'


그 이후로 웬만해서는 달리지 않아예 달리기 자체를 피하고 꺼리던 소녀는, 체력장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마지못해 울며 겨자 먹기로 달려야 했지만, 늘 출발과 동시에 금세 뒤로 처지며 꼴찌를 도맡아 하는 기록을 세우곤 했었다.


그랬던 소녀가 몇십 년 후...

달리기에 환장해서 새벽이건 한밤중이건, 산길이건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며, 이제는 대회에서 순위 경쟁까지 하는 아줌마 러너가 되어있다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베테랑 선수 출신의 노련한 두 일본 아줌마들과, 팔팔하고 에너지 넘치는 중학교 소녀에 이어 결국 여자부 4등으로 골인한 거북 맘.

게다가 이번 레이스에서는 이때까지 세운 5킬로미터 개인 기록을 경신하며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결과를 보여주었다.

비록, 더 잘 달리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다지 빠르지 않은, 별거 아닌 기록일 수 있겠지만,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얼마나 혼자서 열심히 노력하며 꾸준히 쉬지 않고 달려왔는지, 다른 누구보다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스스로 대견하고 흐뭇하기까지 했다.


3등에 대한 미련과 상금에 대한 아쉬움에, 골인하고 얼마 후 까지는 솔직히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저쪽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는 금발의 13살 소녀에게 다가가 축하 인사와 함께 진심 어린 응원의 하이 파이브를 날려주었다.


참 많이 컸다, 거북 맘!

파릇파릇 어리고 젊었던 시절보다 더 강하고 빨라진 50세 아줌마라니...

앞으로도 쭉~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조급해하거나 무리할 필요 없이, 현재의 내 모습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자고...

하지만, 멈추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고...

모든 조건과 상황이 허락하는 그 순간까지, 백발을 휘날리며 달리고 있을 미래의 내 모습을 떠 올리며 작지만 굳은 결심을 스스로에게 조용히 해 본다.


이봐,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면 안 되는 거지~
안 그래?


넌 올챙이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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