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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Feb 28. 2024

내 머릿속의 지우개

갱년기 건망증

바쁜 아침이다. 대부분의 학생 자녀들을 둔 엄마들처럼 말이다.

10킬로 새벽 러닝을 하고 돌아와 후다닥 샤워를 마친 후, 아침 청소에 냥이들 밥 주고

두 고딩 딸내미들 깨워서 아침 먹이고 도시락 싸고 학교에 드롭까지 해 주면, 비로소 숨을 돌릴 시간이 생긴다.

차를 돌려 도착한 곳은 자주 가는 마켓.

냉장고에 채워 넣을 거리도 사고, 뭐 새로운 게 들어왔나 싶어서 들러본다.

여유롭게 자동문을 통해 마켓에 들어선 순간, '어? 또? 아 진짜...'

또 그 증상이 시작된다.

'내가 여기 뭐 사러 왔더라? 왜 여기 들렀지?'

분명히 이것저것 살 것들이 있었고 그중엔 오늘 꼭 필요한 것도 있었는데...

오늘따라 핸드폰 메모장에도 목록을 작성하지 않았고 종이 쪼가리에 끄적인 것도 없다.

이런 증상은 40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점점 그 강도가 세지더니

몇 년 전부터는 종종 당황스러울 정도로 심할 때도 있다.


멀뚱하니 마켓 입구에서 정지화면처럼 서 있자니, 직원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래, 마켓을 돌아다니다 보면 생각이 나겠지' 싶어서 가게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참 난감하고 환장하게도, 마치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정전이라도 일어난 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증상.

노화의 과정들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소싯적부터 기억력 하나는 남부럽지 않게 좋다 못해,

때로는 제발 좀 잊었으면 하는 것들 조차 끝까지 구체적으로 기억하던 나였기에

이런 변화는 당연히 당황스럽다 못해 서글플 수밖에 없다.


기억을 더듬어 우여곡절 끝에 쇼핑 카트에 물건들을 담고 계산을 마친 후, 마트 주차장으로 가고 있는 도중에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온다.

헐레벌떡 나를 쫓아온 마트 직원은, '정말 너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외친다.

"Please take your stuff!"

이런 젠장할...

실컷 계산하고, 쇼핑한 물건들을 담은 봉지는 계산대에 얌전히 놔둔 채 몸만 나온 것이다.

이쯤 되면 심한 자괴감이 들다 못해 절망적인 생각이 들고 슬슬 두려움 마저 밀려온다.

'벌써 이러면 어쩌자는 거니 정말...'

하긴 엊그제는 집 근처 구멍가게에서, 쇼핑한 물건들을 야무지게 챙겨 오긴 했으나 정작 신용카드는 계산대에 두고 오기도 했으니 그보다는 낫지 싶다.

내 나이 또래의 여자들과 가끔 만나 대화를 해보면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마치 누가 누가 더 바보인지 경쟁이라도 하듯, 각자의 무용담(?) 내지는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사연들과 함께 하다 보면,

'그래도 쟤보다는 내가 아직 낫네' 하는 뜻밖의 위로를 받을 때도 있고, 나 혼자만 겪는 증상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 내 머릿속에만 지우개가 있던 게 아니었어!'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피부만 쳐지고 관절만 삐그덕 거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총기 있던 두뇌와 기억력도 무뎌지면서 희미해지고, 아무리 무언가를 열심히 기억하려고 해도 다음날이 되면 마치 처음 보는 것 마냥 새롭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년 여성들 사이에서 언제나 화제의 이야깃거리가 됨과 동시에 걱정거리 1호로 등장하는 갱년기.

바로 그 갱년기를 정통으로 맞고 있는 나.

어쩔 것인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을...

그리고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을...

내 육신과 정신이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들 중 하나일 뿐 인 것을...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도 충격받지도 말자. 쉽진 않겠지만...


하지만 이런저런 노력은 해보자. 열심히 살아보자. 게으르거나 나태해지지 말자.

더 열심히 달리고, 글도 많이 쓰고 책도 자주 읽고...

아, 그런데... 화장지를 샀어야 는데 그걸 결국 못 사고 그냥 왔네.

이런 젠장, 집에 화장지가 똑 떨어졌는데 말이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가 쇼핑 리스트에서 화장지를 지웠나 보다. 희미하게라도 남겨놓지....

오늘도 나는, 어느 날 불쑥 찾아온 갱년기라는 친구와 서로 익숙해지려고 부단히 노력 중이다.

아자아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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