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아라! 놀다 지쳐 잠드는 것이 너의 운명

놀고 놀고 또 놀고

by 죠앤

놀아라!

놀다 지쳐 잠드는 것이

너의 운명


"엄마!! 왜 이렇게 빨리 데리러 왔어!"


그럼 그렇지, 네가 왜 그 말을 안 하나했다.

8시간 이상을 어린이집에 머물렀으니

방전이 될 만한데,

오히려 ‘하나도 못 놀았어!’하며 억울해한다.

저 작은 체구에 멈추지 않는 에너지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건가.


처음엔 어르고 달래서 집에 데리고 왔으나

어차피 집에 와서 딱히 공부도 안 하는데,

어린이집에서 1-20분 더 논다고 큰일 날 것도 없었다.

나중엔 나도 시간 계산을 하며 집을 나섰다.


‘지금 나가면 30분 정도 기다릴 테니,

쌀이나 안쳐 놓고 슬슬 걸어가 볼까?

오늘도 분명히 집에 누군가를 초대한다고 할 것 같은데,,

가만있자,, 계란이 남았던가?’


나에게 ‘아이가 하원 한다’는 것은

‘아이 친구도 우리 집에 올 가능성이 99%’라는 것과 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니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기본 4인분의 식사를 예측해야 했다.

혹은 제일 빠르게 배달 올 수 있는 음식점 전단지를 챙겨두거나.

그렇게 저녁밥까지 먹고 헤어져야

하루가 끝나는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느 날은 제일 일찍 데리러 가서

결국 어린이집 문 닫고 나올 때까지 머무른 적도 있었다.

문밖에서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들어가 아이를 기다릴 수 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이었기에 망정이지.

밖에서 대기했으면 아마도 난 망부석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 아니다.

나 역시도 아이가 더 놀겠다는 말을

내심 기다렸다는 것이 더 솔직하겠다.

하원 시간에 오는 부모들을

오랜만에 만나는 것처럼 맞이하며

서로의 하루를 묻던 시간을 사랑했던 것이다.

아이가 그런 엄마의 마음까지 헤아리며 ‘일부러’

더 논 것이었을까?


엄마, 나 아직 못놀았다니깐!




왜 이리 빨리 왔냐고 볼멘소리로 투덜대다가,

[그러면 우리 집에 누구 초대해]라며 흥정을 한다.

놀고 또 놀고도 아쉬워서 친구들을 부르고 싶은 아이.

엄마도 집에 사람들 오는 건 오케이!


자고로 공동육아 문화의 꽃은 ‘마실’ 아니겠는가.

어른들도 아이들도 설레는 마실.

스스럼없이 서로의 가족을 초대하고

밥을 지어 나누어 먹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첫 1년간 마실을 한 횟수가 100번이 훌쩍 넘어갔다.

3년을 계산해보면 아마 수백 번은 될 것 같다.

참 어지간히 잘 놀았다 싶다.

어른들이 한참을 얘기하고 나서

“자세한 건 이따가 카톡 하자”라고 말한다면,

아이들은 한참을 놀고도

“우리 내일 또 놀자!”라고 말한다.

이야기보따리를 한가득 풀어놓고도

어른들도, 아이들도

헤어짐이 아쉬웠던 마실이었다.

내일이면 또 얼굴을 보는데도 말이다.


그동안 기관 생활을 못한 한풀이라도 하려는 듯,

아이의 생활은 놀고 놀고 또 놀다가 지쳐서

잠이 드는 것의 반복이었다.

심지어 꿈에서도 노는지 잠꼬대도 아주 스펙터클했다.

발차기, 소리지르기, 웃기, 울기..

아이의 꿈은 언제나 멀티 플렉스.


물론 마실을 한 날들이 늘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을 호기롭게 초대해놓고

막상 장난감을 내어주자니

마음속에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했다.


친구들이 구석에서 용케 찾아낸,

정말 이사를 가지 않는 한 보지도 못했을

몇 년 묵은 장난감도

'이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아끼는 것'이라며

못 빌려준다 투덜투덜,

간신히 같이 가지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을 내어주고도

망가질까 불안불안,

자기가 원하는 스타일대로 가지고 놀기 바라며

잔소리를 주절주절.


어이쿠 이럴 거면 왜 초대한 거야 정말.


마음은 친구들과 호원 결의를 다졌지만,

현실은 곁을 내어주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아이가 친구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허락’한다는 것은

마음의 빗장을 풀었다는 거 아니겠는가.

단박에 그 빗장을 열고

두 팔 벌려 환영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당연.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러면서 함께 하는 사회생활 배우는 거지.


그렇기에 나는 아이가 원해서도 마실을 했지만,

아이를 위해서도 마실을 했다.

“이번 주 뭐해요? 우리 마실 합시다!”


내가 이토록 마실을 사랑했던 건

아이에게 아날로그 감수성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치고받고 싸우다가도

다시 골목길에서 만나 화해하고

“노 올 자아~”동네방네 소리치며

해가 질 때까지 놀았던 시간들,

용케 사온 불량식품 하나를

엄마 몰래 나눠 먹으며 나눴던 비밀.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그 아날로그 감수성을

친구들과 부대끼며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공부머리 학습법부터 배우기보다

사람들과 나누는 마음가짐부터 배우길 바랬다.


손에 연필을 잡는 시간보다

친구의 손을 잡고


영어 흘려듣기보다

서로의 웃음소리를 귓가에 담아두길 바랬다.


이렇게 내 품 안에서만 있을 것 같던 아이는

부대끼고 배우며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때론 넘어지고

때론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나중엔 동생들에게 손을 내미는 언니, 누나로 성장했다.


그래, 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놀고 놀고 또 노는 거야!

[진정 논다는 것은 이런 것]을

온몸으로 배우는 시간들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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