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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태현 Feb 13. 2024

엽편소설

짧은 이야기들

1. 짧은 연극


정은이가 말했고, 지환이가 들었다.

...그러니깐, 네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저 내 말이 맞다고 말하는 건데, 너는 왜 매번 그렇게 곡해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어. 이렇게 매번 싸워야지만 직성이 풀려? 그냥 내 말이 '맞다.' 이렇게만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 왜 너만 맞다는 거야? 나는 맞으면 안 돼?

이번에는 지환이가 말했고, 정은이가 들었다.

내 말이 틀린 게 아닌데 왜 네 말이 맞는 건데. 그거부터가 오류 아니야? 논리가 안 맞잖아. 매번이 아니라 그냥 이번 한 번뿐인 거고. 됐다. 이제 그만하자.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깐 넘어가 이제.

지환이는 말을 마쳤고, 둘은 침묵했다.

신촌의 겨울바람은 건물을 구석구석 쏘다니다 더 매섭게 날카로워졌다. 어느 초등학교 담에 내걸린 정치인의 현수막이 팽팽함을 잃고 너풀대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밑에서 서로 실랑이를 하는 두 사람보다 어쩌면 더 요란했으려나. 시끌벅적하게 술 취한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이었으니, 그것조차 눈치챌 수 없었다.

라고 지환이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2층 술집에서 아무개 커플의 실랑이를 보며 나름의 스토리를 잘 부여했다고 생각했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정은은 그 옆에서 심드렁하게 맥주잔 밑 젖은 휴지를 손가락으로 뜯어내고 있다.

"안 웃겨?"
"이젠 지겨워"
"그래도 저번엔 웃었잖아"
"그건 저번이고"

손가락으로 뜯어낸 휴지를 동그랗게 뭉친 정은이 그걸 요리조리 꼼지락 거리다 지환의 맥주잔에 던진다.

"더럽게 뭐 하는 거야"
"왜 재밌잖아"
"뭐가 재밌어?"
"나도 한 번 해봤어, 내가 재밌는 거"

지환과 정은, 둘 중 이번에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고 누구도 듣지 않았다. 시끄러운 소음으로 잠시의 침묵이 가려졌다. 장막이 내려온다. 이제 연극이 끝날 시간이다.


2. 진공


 연게 할 말을 고르지 못했다. 다른 테이블의 소음, 아무런 맥락 없이 흘러가는 정현의 기타 소리만 채워졌다. 연주소리는 좋지도 그렇다고 너무 듣지 못할 소리도 아니었다. 둘 사이의 적막을 채우기에는 딱 좋았다. 은 가만히 을 바라보다가 맥주를 마셨다. 맥주의 거품이 파도처럼 의 입술 근처에 부딪히며 부서졌다. 조금씩 맥주가 의 입으로 들어가면서 조용히 사라져 갔다. 오늘 처음 정현의 여자친구로 소개받은 이었지만, 숨은 좀 더 연과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한 잔 더 할까?"


조심스럽게 이 입을 뗐지만 의 소리는 정현의 기타 소리에 뭉개졌다. 들었을까. 그런 것 치고는 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남은 맥주를 빠르게 속으로 집어넣고는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숨의 숨은 이제 가파르지도 메마르지도 않을 때쯤이었다.


"난 정현이랑 아무 사이 아니야"


숨은 혹시 연이 정현과 자신의 사이를 의심하는 것만 같았다. 물론 정현과 이전에 가볍게 만나기는 했지만, 단 한 번 밖에 섹스를 하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는 정현과 숨은 확실하게 자신들이 친구라는 걸 각인했을 뿐이었다.


연은 맥주를 내려놓았다. 연이 입술을 움직였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 어차피 시끄러운 소리에 묻혀버려 숨에게 닿을 수도 없을 텐데. 어쩌면 의미가 텅 빈 말일 텐데.


연은 들리지 않으면 좀 더 가까이 오라고 얘기했다. 손모양을 보고 숨은 연의 소리를 더 가까이 듣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고서는 아무런 물음도, 대답도 없이 연이 숨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서로가 마주 보던 공간은 사라졌다. 숨은 숨을 쉬지 않았다. 연도 숨을 쉬지 않았다. 잠시 그 진공에서 숨과 연은 떠돌았다. 진공에서 두 물체는 동시에 추락속도는 동일했다. 무언가 연이 오물오물 말을 하기는 했지만 진공에서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


정현이 기타를 치다 숨과 연을 바라봤을 때, 테라스 밖의 한강은 잠잠했다. 그 근처에는 쓸쓸히 거리를 걷는 사람들, 달리기를 하는 무리, 술을 마시는 사람들, 부랑하는 이들이 빠른 유속으로 흘러갔다. 어떤 풍경도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지만 그 순간들과 정반대로 강물은 흐르고 있었다. 정현이 기타를 내려놓고 한 걸음씩 발을 뗐다. 곧 모든 것들이 무너질 것만 같은 두려움들을 안고, 천천히 달이 물결에 따라 찢겨나가고 있었다. 다만 달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3. 미래에 쓰였던 지금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내가 기억을 할 수 있었을 때부터였는데 그전부터 아마 나는 미래를 볼 수 있었을 거다. 나는 그때부터 아버지의 요도를 따라 그 어떤 정자들보다 빠르게 그리고 가장 먼저 자궁으로 착상할 것임을 알았다. 또 엄마가 11시간의 진통을 느낀 뒤 내가 세상에 빛을 볼 것을 알았을 거다. 물론, 이건 내 기억 이전의 일이기에 추측만 할 뿐이다.

예측한다는 것과 예견한다는 것의 차이는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기억이 시작되기 이전은 추측이고, 기억이 시작된 이후는 늘 예측이었지만, 그 일들이 이뤄지고 나서부터는 예견이었음을 알게 됐다. 그러니깐 앞서 말한 예측과 예견의 차이는 '뭔가가 이뤄짐에 따라서 결정된다'가 나에게 부여된 정의였다. 물론 이것도 미리 글로 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결정된 사안이다.

내가 미래를 예견한다는 걸 12살 때 엄마에게 말할 예정이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12살이 되기 전까지는 예측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그 시점이 왔던 건지, 올 것인지는 잘 모른다. 그냥 그렇게 봤기에 그렇다고 할 뿐이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까를 11살 때 미리 고민할 것도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미리 보기는 했지만, 그게 실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였으니 결국 이루어지는 건 내 판단에 따르는 거였다. 물론, 나는 그걸 하게 될 예정이기는 했다. 아닌가, 벌써 했던 건가.


예정된 대로 사는 삶은 귀찮으면서도 고통스러웠고 부지런해야 했으며 내게 언제 행복이 올지도 알아서 행복하면서 늘 불행했다. 어쨌든 내 현재는 늘 미래와 함께였다. 덕분에 현재가 과거이기도 했다. 젠장, 근데 그게 일어난 건지, 일어날 것인지를 아직도 도통 모르겠다. 아직이라고 했는데, 아직인가. 머리가 조여 온다. 조여올 것이다. 조여졌다. 그 어딘가의 사이에서 쓴다. 아니, 썼다. 그래 쓸 예정이다. 젠장.

이 글을 쓰는 지금에도, 쓰일 지금에도, 쓰였던 지금에도 나는 이 글이 어떻게 쓰일지 알고 어떻게 끝마쳐지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읽고 있다면 이미 쓰인 거다. 그 순간부터는 이제 모든 건 과거다. 하지만 내가 미래에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기에 확신하지는 않고 예측만 한다. 어쨌든 미래의 나든, 지금의 나든, 과거의 나든 누군가는 쓰겠지. 뭐가 됐든 곧 이 글은 끝이 날 예정이다. 그건 확실하다. 이건 어느 시점의 내가 무조건 할 일이니깐. 당연히 나는 이 시점부터 내가 미래를 보는 능력을 잃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미래를 보지 못하는 그 이후의 삶은 어떤 걸까. 이미 지나간 걸까. 이제 펼쳐지는 걸까.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니 그저 내가 아는 것의 문제일 뿐일까.


이 암흑의 끝에서 다음 문장은 어떻게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후는 미래의 내가 매듭지어줄 터다. 살아보지도 않아 놓고 이미 알고 있는, 이제는 정말 모르는 내가 써줄 거다. 젠장, 이제 도대체 뭐가 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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