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미술이 처음부터 서정적인/주관적인 미술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미술은 춘추시대부터 한나라까지는 형사(形似-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옮겨 놓은 그림)를 중시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형태와 정신과의 관계에서 정신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특히 사대부 화가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송나라 때부터는 정신/마음을 강조하는 경향이 중시되었다.
이후 동양 미술의 목표는 객관적 재현이 있지 않았다. 동양미술의 목표는 현실의 재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진실된 무엇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동양의 미술은 객관적인 현실의 재현에 만족하지 않았다. 동양 미술의 목표는 현실의 재현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진실된 ‘무엇’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정신(神)이었고, 의미/뜻(意) 이었다. 정신(神)과 의미(意)를 그리는(寫) 것을 동양에서는 사의(寫意)라고 불렀다.
근대 서양의 화가들에게 진실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지금, 이 순간을 그리기 위해 공간을 고정시키는 원근법과 명암법 등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동양의 진실은 지금, 이 순간을 고정시키는 일이 아니었다. 동양화가들에게 사실/진실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현실 너머의 영원한, 변치 않는 실체인 신(神-정신)을 그리는 사의(寫意)에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동양미술에는 사전적 의미의 리얼리즘 미술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동양화는 지금, 여기를 묘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눈앞의 생생한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동양의 화가들은 묘사 기술을 갈고닦았다. 그러나 그런 미술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대부(士大夫)라 불리는 지식인 화가들이었다. 학문적 소양이 깊은 사대부들은 사물의 단순한 외형적 묘사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사대부들은 사물의 외형을 똑같이 묘사하는 화공들의 그림을 멸시하기까지 하였다.
사대부 화가들은 사물의 내면에 자리 잡은 정신을 표현하는 일이 미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내면의 정신을 표현하는 일을 사의(寫意)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뜻(意)이란 것이 눈으로 쉽게 볼 수가 없다는 데에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사의란 단순한 기능적인 묘사 기술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이다. 사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높은 학문적 소양과 정신적 수련이 요구되었다.
사의(寫意)는 고대의 전신(傳神)이었는데, 전신(傳神)은 정신(神)을 전하다(傳)라는 말로 과거부터 동양화의 주요한 작품 창작의 원리였다. 전신(傳神)의 문제가 처음 거론된 것은 한 대(漢代)의 회남자(淮南子)에서였고, 전신을 이론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중국 동진(東晋)의 전설적인 미술가 고개지(顧愷之)였다. 고개지는 회화 작품의 창작 시 형태만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파악할 을 중시하였다. 그래야만 비로소 형태(形)와 정신(神)이 겸비된다고 주장하였다.
동양의 미술은 일찍부터 형상 이면에 내재한 정신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전신(傳神)은 동양 미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서양미술에서도 정신의 표현은 매우 중요했다.
서양미술도 형태 이면의 정신의 표현을 중시했는데, 특히 형태의 완벽한 재현을 실현한 17세기 이후 집중적으로 정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렘브란트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어려웠던 말년에 그린 그의 얼굴로서 그의 얼굴에는 “나, 렘브란트, 세상에서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는 듯하다. 그의 초상화를 접하면 마치 현실에서 살아가는 복잡한 심정을 지닌 인간을 접하는 듯하다. 렘브란트가 중점을 두었던 것도 바로 동양식으로 표현하자면 전신(傳神) 이었다. 렘브란트는 전신(傳神)에 성공했다. 그래서 그의 초상화는 살아 있는 듯 리얼하다.
사의를 중시하는 동양의 사대부들이 그린 그림을 문인화라고 부른다. 사대부 화가들은 후한(後漢) 말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하여 청나라 말기까지 활동하였다. 문인화는 사실적인 표현보다는 사의적인 표현을 중시하였다. 문인들이 사의(寫意)를 표현하는 일은 이(理)를 중요시하는 성리학 이론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기(氣)의 작용으로 만들어지는 물질세계의 이면에 자리한 이(理)의 포착과 표현이야말로 사대부 화가들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그런 이유로 문인화는 기(氣)의 변화로 만들어지는 현란한 물질세계의 변화에 관심을 쏟지 않고 천지만물의 원리를 헤아리는 일, 즉 이(理)의 표현에 관심을 두었다. 원래 똑똑한 사람들은 현상 너머의 원리에 관심이 많은 법이니까.
조선 전기의 선비화가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쉽게 말하자면 고사(高士), 흐르는 물을 보다(觀水)이다. 시냇가의 커다란 바위에 팔을 괴고 흘러가는 물을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고사(高士)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한 듯이 보인다. 고사(高士)의 진지한 표정이며 동작이 아주 자연스럽다. 강희안의 그림은 마치 선비가 글씨를 써 내려가듯 자연스럽게 처리되었다.
고사의 얼굴은 매우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단지 몇 개의 선과 점이 찍혀 있을 뿐이다. 고사(高士) 주변의 돌과 나무도 그렇다.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단단한 돌과 울창한 나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단지 몇 번의 붓질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만 사실적으로 정밀하게 묘사한 그림보다도 사물의 정수가 훨씬 잘 표현되어 있다.
강희안은 기(氣)의 작용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하는 세세한 현상을 그려내는 일에 힘쓰지 않고 사물의 본질적인 모습을 포착하여 간략(簡略) 하게 표현하려고 하였다. 사의(寫意)는 일반적으로 사물이나 현상의 핵심(核心)을 포착하여 간략하게 표현해낸다. 사의(寫意)는 아무리 관찰력이 뛰어나도 학식이나 수양이 부족하면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여기에 동양미술의 어려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