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프면 말이 안 나와
※ 심신이 미약하신 분은 읽지 마시길 당부드림
'일요일 단 하루, 브로콜리 1개 900원 특가세일!'
자주 가는 마트에서 알림 메시지가 왔다.
이밖에도 여러 세일품목들이 열거돼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건 브로콜리에 관한 소식이었다.
십자화과 채소들 중에서도 브로콜리는
특히 항암효과가 뛰어나기로 손꼽히는 건강식품.
남편도 예전엔 본 둥 만 둥 하더니
요즘은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며 접시를 싹싹 비웠다.
그 모습을 보는 게 나의 기쁨이었다.
음식도 약이 된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브로콜리를 즐기는 또 다른 이유는
요리법이 간단하다는 것.
요리법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찜기에 찌기만 하면 됐다.
관건은 시간이었다.
물컹하거나 덜 익은 상태로 꺼냈다가
낭패를 보기 일쑤였지만, 이제는 안다.
물이 끓고 난 뒤 골든타임 3분만 잘 지키면
아삭하고 건강한 맛의 식감을 살릴 수 있었다.
"꼭 트리 같지 않아?"
브로콜리를 초장에 콕 찍으면서 내가 했던 말이다.
영양가도 높고 맛있고 간편한 데다
모양도 어쩜 이리 복스럽게 생겼는지.
선물이 놓인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이 식물도 남편에게 건강을 선물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 더해졌다.
다만 일상 채소 치고는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개당 2500원~3000원 선.
그 앞에 서면 늘 시간이 지체되었다.
조금이라도 큰 걸로 골라 담느라.
근데 900원에 판다니,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일요일 아침, 마트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해서
브로콜리 앞으로 직진했다.
싱그러운 초록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금광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나처럼 오픈런 한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초록 광산의 매대 앞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금을 캐내듯 세심하게 이모저모 살폈다.
기왕이면 숱이 많고 몸통이 다부진 걸로.
신중하게 10개를 골라 담았다.
브로콜리로 가득한 상자를 안고 올 때만 해도 뿌듯했다.
만선의 기쁨을 안고 항구로 돌아온 선장이 된 것처럼.
한데 막상 집에 돌아와 펼쳐놓고 보니 고민이 됐다.
이 많은 걸 어떻게 보관한담?
검색해 보니 한꺼번에 찌거나 데쳐서 냉동하면
한두 달은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오케이. 나는 그 풍성하고 탐스러운
녹색 부케들 가운데 3개를 꺼내 들었다.
차례로 뒤집어 물에 담갔다.
식초를 풀고 10여분을 기다렸다.
깨끗한 물에 휘휘 저으면서
몇 번 더 헹군 뒤 도마로 직행,
이제 먹기 좋은 크기로 썰기만 하면 준비 끝이었다.
그런데 줄기 부분이 딱딱하기가 시멘트급이었다.
칼이 안 들어갔다.
늘 먹던 건데 오늘은 더 안 썰리네.
보숭보숭한 윗부분보다
줄기에 더 효능이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정말 한 순간이었다.
도마에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왼손 검지와 중지가 칼날에 베이고 말았다.
처음엔 너무 놀라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도하듯 눈을 감고 베인 손가락을 꾹 눌렀다.
3초간 정적.
아아~~ 으아아아~아으아!
한 손을 움켜쥔 채로, 다문 입술 사이로,
으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소파에서 TV를 보던 남편이 후다닥 뛰어왔다.
빨리 휴지휴지!!!
얼마나 다친 거야, 많이 다쳤어?
괜찮아? 병원 갈까?
아니
약, 약
대일밴드, 밴드!
정신없이 약을 바르고 밴드로 두 손가락을 칭칭 감았다.
남편은 어떻게 된 거냐며,
왜 자기를 안 불렀냐며 버럭 역정을 냈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나는 안다. 너무 걱정이 돼도 그가 화를 낸다는 걸.
화를 많이 낼수록 많이 걱정된다는 뜻이다.
안타까워하는 그가 보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일단 너무 아팠고, 속으로 좀 떨고 있었다.
아픔의 당사자이자 일련의 과정을 너무 생생하게 봐버린 목격자였기에.
하마터면 어쩔 뻔했나.
만의 하나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그 만의 한 가지 상황이 자꾸만 떠올랐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공포가 나를 덮쳤다.
겨우 브로콜리 하나 썰다가 이 난리를 피우다니.
이만한 일에도 가슴이 벌벌 떨리는데
대형 사고를 경험한 이들이나 그 가족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건 너무 당연하지.
누군지도 모를 그들의 심경을
알아서 짐작하고 이해하고 납득완료 했다.
잔혹한 누아르나 범죄영화는
앞으로 못 보겠다고,
도마나 칼은 싱크대 안쪽 깊숙이 넣어둬야겠다고,
온갖 상념을 한 바가지 들이마셨다.
잠시 누워있는데 다친 부위가 욱신거렸다.
손가락 끝에 심장이 달린 것만 같았다.
"브로콜리 10개 다 손질했으면
손가락이 안 남아났겠다."
남편이 섬찟한(?) 농담을 던졌다.
웃으면 안 되는데 그새 조금 진정이 된 건지,
난 또 실없이 웃음이 났다.
저녁은 남편이 차렸다.
숟가락이라도 놓으려 하자,
부엌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밀어냈다.
"당신이 아프면 내가 하고
내가 아프면 당신이 하는 거야."
그러곤 고봉밥을 담아 주었다.
"오늘 피 흘렸으니까 밥도 많이 먹어야 해."
식탁에는 알맞게 데쳐진 브로콜리가 올라와있었다.
좀 노려보다가 와작와작 씹어먹었다.
'씹어 삼켜도 시원찮다'는 말이 실감 났다.
지금도 왼손가락 두 개는 반창고 범벅이다.
그나마 오른손을 다치지 않아 다행이고
연휴인 것도 차라리 다행이었다.
하지만 한 손을 쓰지 못하니
불편한 게 한 둘이 아니었다.
빨래며 설거지, 청소 등 집안 일도
전부 식구들 손을 빌려야 했다.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라고
시키는 게 내 역할이었다.
입만 갖고 다 했다.
미안하면서도 때아닌 호사를 누리는 기분이
아예 없진 않았다.
아침엔 남편이 머릴 감겨주었다.
말리는 것도 도와주었다.
드라이를 하고 있는데 이발소에선 이렇게 말린다며 수건으로 자꾸만 머리를 털어댔다.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머리카락이 뒤집어졌다.
그래놓곤 재미있다고 큭큭 웃었다.
난 이번엔 따라 웃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물었다.
그는 보지 못하고 또다시 수건털이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눈으로 레이저를 한발 쏘았을 뿐
따발총은 거둬들였다.
머리 감겨준 은공으로.
브런치 글쓰기도 평소엔 노트북으로 하다가
오늘은 스마트폰으로 쓰고 있다.
폰으로 쓰는 것도 괜찮았고
맞춤법 검사가 되는 것도 처음 알았다.
(브런치에 쓸거리도 하나 생겼다.)
그렇다고 '덕분'이라고 할 순 없다.
이 모든 게 브로콜리, 너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