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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솥은 죄가 없다

인생이 뒤통수를 친다 해도

by 나야 Feb 24. 2025

냄비 안에서 손등까지 차올랐던 물이 밤새 졸아들었다. 물기를 머금은 콩들이 불룩하게 배를 내밀고 있었다.      


- 불어난 거 보이시나요? 어제보다 말랑해졌죠?      


유튜브 영상 속의 남자가 콩 한 알을 들어 깨무는 시늉을 했다. 처음보다 딱딱한 정도가 덜하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삼키지 못하고 입 안에 머금고 있었다. 카메라가 얼른 손을 클로즈업 했다.       


- 취사 타임! 이제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그가 하는 대로 나도 밥솥에 콩을 들이부었다. 5~6인분 정도의 쌀을 넣었을 때와 비슷한 높이가 맞춰졌다. 뚜껑 닫고 취사 버튼, 꾸욱.      


암 환자에게 콩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런데 시판 두유는 아무래도 첨가제가 신경 쓰였다. 그래서 두유 제조기를 구입했다. 직접 만든 두유는 사먹는 것보다 확실히 더 담백하고 고소했다. 그러던 중 이 영상을 봤다. 생콩을 바로 쓰기보다 밥하듯이 쩌서 두유를 만들면 영양가가 높아진다니, 나도 당장 해봐야지.


- 이제 열어볼까요?


잠시 후 화면 속에서 남자가 밥솥 뚜껑을 열었다. 푹 익은 콩을 건져 올려 손으로 누르자 금방 흐무러졌다. 국자로 떠서 믹서기에 갈아 마시는 장면이 이어졌다. 보고만 있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완전 쉽잖아. 의욕이 솟구쳤다.




쉬익, 쉬익!

취사 마무리 단계, 우리 집 밥솥도 기차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흰 연기가 치익 뿜어져 나왔다. 이제 뜸만 들이면 된다. 헌데 웬걸. 밥솥 밑에서 검은 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갑자기 뭐지? 전기 합선인가?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급한대로 두루마리 휴지를 화르륵 풀어 물을 닦았다. 아니, 틀어막았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치 홍수라도 난 것처럼 하염없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 주방바닥이 흥건해지고 있었다.

    

베란다로 쫓아가 걸레를 들고 왔다. 수건이며 신문지도 집어 들었다. 바닥을 덮어야 했다. 물이 더 번지지 않도록.


결혼 20년동안 밥물이 흘러 넘치긴 처음이었다. 설마, 터지는 건 아니겠지? 간혹 등장하는 밥솥 폭발사고 뉴스가 떠올랐다. 심장이 쿵덕거렸다. 다급히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이상하게 전원이 꺼지지 않았다. 시뻘건 눈을 부릅뜬 밥솥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전기코드를 뽑아버렸다.      




온 집에 비릿한 생콩 삶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 난리통에도 콩의 상태가 궁금했다. 비싸게 주고 산 서리태 콩이었다. 밥솥은 맛이 갔어도 콩은 살려야지. 서둘러 뚜껑을 열었다.

   

근데 어라? 이번엔 밥솥 뚜껑이 열리지 않았다.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밥솥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진흙 속에서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문 꼬막처럼.   

    

인터넷에 ‘밥솥 뚜껑이 열리지 않을 때’를 검색했다. 이런 경우가 심심찮게 있는지, AS가 시급하다는 답변이 보였다.  

    

반쯤 익은 콩이 가득 든 밥솥을 들고 낑낑대며 AS센터를 찾아가는 내 모습이 그려졌다. 어쩌다 이랬냐고 하면 뭐라고 하지?


'쌀 대신 콩을 부었거든요. 이게요, 생콩을 바로 먹는 것보다 훨씬 양분이 뛰어나거든요, 집에 암환자가 있구요. 암환자한테 단백질이 필수거든요!'

    



닦아도 닦아도 검은 콩물은 멈출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내렸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더 막막했다. 3년 전 이사 올 때 남편과 밥솥을 사러 가던 날, 그땐 이런 일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암 환자가 될 줄은 꿈엔들 알았겠나. 암이 왜 걸렸는지, 의료진도 정확한 원인을 모른다고 했다. 암 판정을 받던 날 병원 복도에 멍하니 앉아있던 순간이, 소리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 순간이, 하필이면 떠올랐다.


급기야 인생이 야속한 지경에 이르렀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왜 시리즈로 오는 건지. 삶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가 있나. 살면서 나쁜 짓 한 적도 없고 윗층에서 아침마다 마늘을 그렇게 찧어도 싫은 소리 한번 한 적이 없는데. 그저 꾸역꾸역 착실하게 살았는데 느닷없이 암선고라니. 그래서 콩이라도 삶아먹이려고 했는데 이젠 또 밥솥까지 말썽이다. 하는 일마다 왜 이러냐고, 대체!!

   

스멀스멀 비관이 고개를 들었다. 친정엄마가 틈만 나면 신세한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하던 이 딸내미가 얼마나 인정머리 없게 느껴졌을까.

  



그래,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뭐, 밥솥 하나 버린 셈 치자.      


근데 버릴 때 버리더라도 진짜 한번만 더 해보자.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힘주어 열림 버튼을 돌렸다.

그런데, 너무 쉽게 돌아갔다, 스르륵.

30여분 만에 드디어 밥솥 뚜껑이 열렸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찔끔 났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밥솥 뚜껑의 열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에 다닥다닥 콩이 박혀있었다. 때문에 압력이 차서 뚜껑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밥솥 앞에서 울고불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이토록 일희일비 해도 되는 건지, 좋으면서도 민망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남편이 아픈 뒤로 나도 모르게 계속 긴장상태였음을, 팽팽한 압박을 밖으로 내색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려 왔음을.


하지만 암에는 완치가 없고 정해진 기한도 없다. 계속 관리하면서 가야한다. 평생이 될 수도 있는 마라톤 레이스에서 그렇게 전력질주 하다간 제풀에 쓰러지고 말지.


어쩌면 그래서 밥솥 신이 계시를 내린 게 아닐까.

인생도, 밥솥도 힘을 빼면 편안해진다고.


지옥과 천당을 경험하게 해준 밥솥, 지금은 아주 성능이 훌륭하다지옥과 천당을 경험하게 해준 밥솥, 지금은 아주 성능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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