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당근의 유혹
밤 9시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집안에 정적이 흘렀다. 식구들은 각자 방에 들어가 있고 나는 식탁에서 일기를 쓰는 중.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가 눈 쌓이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얼핏 생각했다. 그리다 당근과 눈이 마주쳤다. 어헛, 어림도 없지. 마른침을 삼키며, 다시 일기 쓰기에 집중했다.
3시간 전, 다툼이 있었다. 홍코너, 동남아 순회공연보다 피곤한 거래처 순회를 마치고 방금 퇴근한 남편 선수. 이에 맞선 청코너는 새학기를 맞아 자리 정하기, 친구 사귀기 등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중학생 딸이었다. 학원 마치는 시간에 맞춰 매번 아빠가 데리러 가는데, 아빠가 10분쯤 지각했다. 하필이면 둘 다 심기가 불편한 오늘.
늦게 온 아빠에게 딸이 꽥하고 짜증을 부렸다. 아빠도 버럭하며 장풍을 날렸다. 에너지와 에너지가 파바박! 충돌했다. 불꽃이 튀었다. 평소 좋을 땐 죽이 척척 맞지만, 싸우면 서로 보기 싫다고 난리인 두 사람이었다. 각자 방문을 닫고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1라운드 종료.
나는 얼결에 수습의 중책을 맡았다. 대화나 사과, 타협 내지는 합의를 시도해보려 했으나 택도 없었다. 남편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동굴로 들어갔다. 저녁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딸은 딸대로, 휴대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화면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총체적 난국. 이럴 때일수록 고민은 신중하게, 실행은 신속하게. 나는 재빨리 식탁을 차렸다. 아이들을 불렀다. 대학생 아들과 중학생 딸이 말없이 숟가락을 들었다. 곁에서 밥 먹는 걸 지켜보다 냉장고를 열었다. 마침 싱싱한 삼치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엊그제 어시장에서 사 온 것이었다. 생선 포뜨기의 달인 할머니가 구워 먹기 알맞게 소금 간도 해주셨다. 두툼하고 푸른 등판에 청량한 빛이 감돌았다.
당장 삼치를 들고 베란다로 나갔다. 달궈진 팬에 삼치를 올렸다. 치지직~~ 소리부터 맛있었다. 고소한 이 냄새에 허기를 느낀 남편이 홀린 듯이 식탁에 앉는 장면을 상상하며 가스불을 조절했다. 불을 다루는 자, 삼치구이를 사수하리라.
사실 밤중에 집안에서 생선을 굽는 건 정말정말 드문 일이다. 아무리 베란다에서 구워도 냄새가 집안 전체에 배이는 걸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냄새를 뒤집어쓸 각오와 함께.
그래도 남편에게 먹일 요량으로 정성을 다했다. 타지 않게 신경 쓰고, 노릇노릇 골고루 익도록 앞뒤 면을 수시로 돌려가면서. 그리고 완성한 삼치구이! 지금까지 이런 맛은 없었다. 겉은 바삭, 속은 촉촉, 이것은 통닭인가 삼치인가.
디테일이 격차를 만든다고 했던가. 양념장도 준비했다. 봄기운 머금은 달래를 쫑쫑 썰어넣고 간장에 고춧가루, 들기름을 약간 섞어 쉐킷쉐킷. 살짝 간을 볼까? 짭조름하면서도 향긋하고 아찔한 맛이 났다. 생선구이 집에서 먹어본 그 맛이었다.
어느덧 밤 10시가 넘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식탁에 방금 구운 삼치를 올렸다. 양념장까지 곁들이니 제법 구색이 갖춰졌다.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편을 불렀다. 그러나 그는 확고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미 양치질까지 했고, 만사가 귀찮다며 그냥 자고 싶다고 했다.
뎅뎅뎅-
노트르담의 종지기가 내 머릿속에 살고 있었나 보다.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애틋한 삼치구이를 단칼에 거절당하고 모든 것이 허망했다. 한마디로 종쳤다.
그때 싱크대에 제멋대로 쌓여있는 설거지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서둘러 삼치를 굽느라 정신없이 동원된 프라이팬, 뒤집개, 이 그릇, 저 그릇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날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자. 언제나 내가 필요한 자리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자리에 먼저 갔던 것처럼.
따뜻한 물이 닿자 그릇에 끈적거리던 기름기가 흘러내렸다. 세제를 묻혀 뽀득뽀득 설거지를 했다. 눅진한 기름기를 깨끗이 씻어내면서 찐득찐득 엉겨 붙은 내 감정도 같이 닦아내고 싶었다. 깔끔하게, 반짝반짝.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니 곳곳에 삼치가 떠다녔다. 싱크대는 깨끗해졌는데, 생선구이 냄새가 그대로 고여있었다. 문을 열어도 소용없었다. 그렇다면 비장의 무기! 식탁에 촛불을 밝혔다. 촛불은 냄새 제거에 직방이었다. 환기도, 페브리즈도 어쩌지 못한 음식냄새를 없애고 싶을 땐 이만한 게 없었다.
일렁이는 촛불 앞에서 나는 일기장을 펼쳤다. 몇 줄 써내려가다 가만히 촛불을 바라보았다. 출렁이던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졌다. 내 속의 악취도 같이 옅어지는 기분이었다.
사람 마음이 참 요상도 하지. 갑자기 남편이 보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암환자에게 스트레스가 가장 나쁜데, 기분이 상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으면 뭘 먹어도 해롭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 있다. 그래서 남편도 차라리 굶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나 당신 마음 안다고. 우린 지금 예민한 시기를 지나고 있을 뿐, 힘들 땐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다 그런 거라고.
그런데 이 거룩한 생각이 깃든 찰나에 뜬금없이 당근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이랑 디저트로 먹으려고 깨끗이 씻어둔, 제주도 구좌읍에서 주문한 당근이었다. 과일처럼 달큰하고 시원한 맛이 나는 당근. 설탕 없이도 단맛을 내는 당근. 쳐다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였다. 어쩌다 보니 나도 저녁을 굶었는데... 저거 하나만 먹어도 배부를 거 같은데...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하아. 정신 차리자!! 남편을 두고 혼자 배를 채울 순 없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독립투사 못지않았다. 결연하게 당근의 유혹을 뿌리쳤다. 잠시 촛불을 바라보았다. 쓰던 일기나 마저 쓰자. 종이에 글씨 쓰는 소리가 쌓여가고, 등뒤에선 희미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편안한 꿈을 꾸길 바랐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니까. 당근? 당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