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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암 수술 이후 달라진 것들

by 나야 Mar 17. 2025

이 브런치북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둘러보니 암투병 중에도 글을 쓰시는 작가님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고통의 순간마저도 기록으로 남기려 집중한, 그 애쓴 흔적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힘든 항암치료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 대목에선 사방이 고요해졌다. 상세한 의학지식과 암관리, 식단 등에 관한 고급정보도 얻게 되었다. 우리도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와 위안은 덤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내로서 바라보는 남편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다짐했다. 암환자의 가족이 되긴 처음이라 좌충우돌이지만 그럼에도 매일이 슬프거나, 불행하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 5화까지 남편의 병명을 밝히지 않았다는 말을 꺼내려는데, 주저리주저리 서두가 길어진다.      




몇 해 전 남편은 갑상샘암 수술을 받았다. '갑상샘암'이라고 하면 치료가 비교적 수월한, '착한 암'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편의 치료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다. 세상에 착한 암은 없다는 것을.


남편의 목에서 발견된 것은 갑상샘암 중에서도 '여포암'이었다. (갑상샘암은 유두암, 여포암, 수질암 등 종류가 다양했다. 이 역시 처음 알았다.) 여포암은 일명 '그림자 암'으로 통한다. 증상이나 통증이 없어 발견이 어렵기 때문. 남편도 그랬다. 목 부위가 붓지도, 목소리가 갈라지지도 않았다. 건강검진에서도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또한 여포암은 다른 조직에 전이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는 위험한 암이었다. 그래서 수술을 통해 갑상샘 조직을 전체 절개하고 림프샘도 일부 제거했다.      





대체 왜?

남편이 암 진단을 받고 한동안 이 물음표를 파고 다녔다. 의료진도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찜찜했다. 뭔가 있을 텐데, 그걸 알아내야 속이 개운할 것 같은데.


짚이는 데가 있기는 했다. 오래전부터 남편은 감기에 걸리면 목이 자주 아팠다. 툭하면 편도가 부었다. 그러나 이 증세가 갑상샘 암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검증된 바가 없다. 편도와 갑상샘은 아예 다른 기관이다. 


유일한 전조증상이라면 평소 '피곤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는 것. 남편은 퇴근하면 옷 갈아입고 씻고 소파에 털썩. 밥 먹을 때 빼곤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그땐 그냥 하는 말이겠지 하고 지나쳤다. 세상에 피곤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피곤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며 툴툴 거리기도 했다. 그것이 암의 전조증상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서 두르고 있던 무거운 갑옷을 가족들 품에서 겨우 내려놓았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 


수술 이후 가장 먼저, 낡고 비좁은 소파를 바꾸었다. 그가 언제든 편히 쉴 수 있도록.




뒤늦게 갑상샘에 대해 찾아보았다. 갑상샘은 아파트로 치면 보일러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집이 추우면 보일러를 트는 것처럼 몸의 체온을 유지하고 대사를 조절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보일러가 망가졌다. 급기야 떼어낸 상태고 보니, 몸이 예전 같지 않은 게 당연지사. 대신 호르몬제를 꾸준히 복용하고 있다. 그래도 수시로 피곤해한다.


워낙 활동적인 사람이라 수술 전후, 체감하는 피로도의 격차가 더 컸을 것이다. 나갔다가 금방 방전돼서 돌아오곤 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껴지면 마음도 처지기 마련. 그가 울적한 빛을 보일 때면 나는 껌딱지처럼 붙어 앉았다. 낮에 먹은 점심반찬이나 아이들 학교생활 등 자잘한 일상을 이야기하며 기다렸다. 그의 배터리가 충전되기를.


그리고 이전보다 남편의 말을 더 귀담아들으려 한다. 지나고 나서 가슴 쳤던 후회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식단 조절도 계속하고 있다. 염증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채식 위주로, 고기는 찌거나 삶고, 자극적인 양념이나 소스는 되도록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좋은 걸 먹기보다 나쁜 걸 먹지 않는 것, 그리고 균형 있게 먹는 것이 좋다. 하루 세끼를 규칙적으로, 골고루.  


자연히 외식이 줄어들었다.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도 먹은 지 오래다. 가끔 아이들이 피자나 치킨을 찾으면 시켜주는 정도다. 덕분에 남편을 따라 가족들도 건강식을 먹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 특히 피곤하거나 스트레스 받으면 맵고 짜고 자극적인 음식이 당기지 않나. 남편도 나도 여전히 보글보글 끓는 라면 광고만 봐도 침이 꼴딱꼴딱 넘어간다. 그래도 참아야 한다. 


매번 집밥을 만들기도 쉽지는 않다. 특히 주말이나 휴일에 삼시 세 끼를 차리다 문득 창밖을 보면 어느새 컴컴해서 놀라곤 한다.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종종거렸네. 당이 떨어지는 기분이다. 


게다가 사람의 입맛이 얼마나 간사한지.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냉장고에 몇 번 들어갔다 나오면 젓가락이 멀어진다. '모르는 여자가 아름답다'가수 이동원의 노래 가사(가을편지)가 음식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새로 만든 음식이다.


예전 같았으면 간단하게 짜장면을 시켜 먹거나 라면이라도 후루룩 먹고 치웠을 텐데. 우렁각시처럼 뭔가를 계속 차려내야 한다는 부담이 등을 떠민다. 물론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는 집밥을 나눠먹는 행복은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라면 봉지에 자꾸 눈이 가는 순간이 있다.  




갑상샘 호르몬감정조절에도 관여한다. (안 끼는 데가 없는 오지라퍼다.) 수술 이후 남편은 전보다 섬세하고 예민해졌다. 사소한 일에도 1.5배 정도 민감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찾은 방법은 감정의 시간차를 두는 것이다. 남편의 감정이 먼저 치고 나오는 치타라면 나는 느림보 코알라처럼 한 박자 쉬었다 가는 편을 택한다. 감정이란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 서로 충돌하지 않게 시차를 두고, 자아, 시계를 본다. 


5분이나 10분쯤 지나면 남편이 설거지나 청소를 하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기도 한다. 감정이 누그러졌다는 뜻이다. 이때는 무슨 얘길 해도 잘 통한다. 감정도 타이밍이 중요하.




전에는 누아르나 액션 영화를 찾던 남편이 이제는 드라마도 즐겨본다. 촉촉해진 감성 덕분에 리모컨 들고 싸울 일이 없다.


요즘 우리가 푹 빠져있는 드라마는 아이유, 박보검 주연의 ‘폭싹 속았수다’. 삶의 통찰이 가득한 명대사와 배우들의 반짝이는 연기, 기막히게 아름다운 풍광에 넋을 놓고 보다가 눈물샘이 후두둑 터지고 만다. 옆을 보면 남편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서로 눈물을 닦아주며 등을 토닥이다 보면 사는 게 별 건가 싶다. 남편은 나의 훌륭한 드라마 메이트다. 


어느새 자막이 올라가고 눈물, 콧물 훌쩍이고 있을 때 남편이 이 말만 하지 않았다면 더 완벽했을텐데. 

"아 배고프다, 뭐 먹을 거 없나?"      


순간 머릿속에서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박보검이 외치던 '노스탤지어'는 어디로 가고, 내 앞에는 '배고프지어'만 남았구나. 속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화르르 쏟아진다. 하루 종일 부엌에 서있다가 엉덩이 붙이고 앉은지 얼마나 됐다고! 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다행히 꿀떡 삼켰다. 지만 그는 이미 나의 눈빛을 읽었다.

"아니~~ 당신 귀찮으면 말고"


민감하기가 아주 꽃샘추위 양뺨을 치고 갈 양반 같으니라고. 한번 째려봐주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이구, 이 늦은 시간에 무슨 배가 고파, 고프기는. 


아이유와 박보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드라마일 뿐, 역시 난 아이유가 될 수 없었다. 아이유는 무슨. 아이구다, 아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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