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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길

곧 신호가 바뀔 거야   

by 나야 Mar 2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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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걸을까?"


퇴근길에 남편이 말했다. 운동 삼아 매일 30분씩은 걷기로 해놓고 지난주엔 거의 나가질 못했다. 꽃샘추위와 바쁜 일정이 발목을 붙들었다.


숙제를 미룬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쌓여갔다. 다행히 며칠 사이 날이 풀리고 여유도 생겼다. 서둘러야 했다. 미적거리다 보면 또 주저앉고 싶어질 게 뻔했다. 나란히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산책로 입구에 들어섰을 때, 불쑥 단무지떠올랐다. 엊그제 남편이 키토 김밥이 먹고 싶다고 했었다. 키토 김밥은 잘게 채 썬 당근과 계란지단을 듬뿍 넣고 만든 건강식. 몸에 좋은 재료들만 넣지만 어쩐지 뒷맛이 좀 밋밋했다. 단무지의 상큼하고 개운마감이 필요했다.


"저녁에 김밥 싸줄게. 근데 단무지가 없어. 마트 갈까?" 


집에서 마트까지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왔다 갔다 30분, 걸어가면 운동도 되고 괜찮을 것이다. 즉시 경로를 수정했다.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로 마트 안이 북적거렸다. 인파 속에서 단무지 앞으로 직행했다. 넉넉하게 2개를 집어 들었다. 언제든 김밥이 생각날 때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시금치는 어때? 두 말하면 배고파, 무조건 맛있지. 시금치와 충실한 백질 공급원, 달걀도 샀다. 김밥재료 준비 .

  

잠깐, 김밥에 국물도 있어야지. 탕국은? 의외의 조합이지만 식구들이 워낙 좋아해서 수시로 끓여 먹고 있었다. 탕국용 해산물은 저번사놨거든, 두부만 한 모 자.      


돌아 나오는데 오이를 싸게 팔았다. 지난주에 담근 오이김치가 벌써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남편과 아들이 경쟁하듯 먹어치웠다. 식성은 못 속인다. 오이 스무 개를 카트에 담았다. 장작 쌓듯이 차곡차곡. 봄에 나는 부추가 보약이라는데 쫑쫑 썰어 넣으면 향긋할 거야. 부추도 팩 하고.      


수산물 코너를 지날 때는 손질한 생선과 눈이 마주쳤다. 딸의 얼굴이 아른 거렸다. 아이는 요즘 소화 불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학기 긴장이 덜 풀렸는지 웬만큼 먹고 나면 속이 부대낀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너무 이해가 됐다. 나는 아직도 싫은 사람과 밥 먹으면 얹히곤 한다. 그런 건 왜 닮아서, 하여간. 생선이라도 좀 구워줄까? 생선구이라면 볼살까지 야무지게 파먹는 녀석이니.


이제 진짜 다 샀지? 아차차, 놓칠 뻔했다. 헤드앤숄더 샴푸가 원 플러스 원이었다. 하나 가격에 두 ! 손이 먼저 나가 물건을 주워 담았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세일이 아니었다.


단무지 2개 + 시금치 한 단 + 달걀 한 판 + 두부 한 모 + 오이 20개 + 부추 + 생선 3마리 + 샴푸 2개


단무지 사러 왔다가 어느새 카트가 수북하게 차올랐다. 더 있다가는 뭔가를  담고 말 기세였다. 얼른 탈출하자. 계산대로 가려는데 카트를 밀던 남편이 걸음을 멈칫, 했다.


"왜 그래?" 

"잠깐만, 땀이 나서" 

"어? 갑자기?"


가슴이 철렁했다. 남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마스크 탓인가? 아님 실내 공기가 갑갑했을까?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전에 어디 쉴 곳을 찾아야 했다. 한데 복잡한 마트 안에는 엉덩이 붙이고 앉을 공간이 한 뼘도 보이지 않았다. 진정될 때까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숨을 고르는 동안 나는 천천히 등을 쓸어주었다.


"괜찮을 거야, 괜찮아,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집에서 쉴 걸, 괜히 마트에 오자고 해가지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그의 안색이 조금 편안해졌다. 서둘러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나눠 담을 차례였다. 장바구니에 샴푸를 담고 나니, 남은 물건들이 죄다 남편한테 가있었다. 그의 장바구니가 두꺼비 볼주머니처럼 불룩해졌다.

 



각자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걸었다. 짐이 있어 그런지 올 때보다 멀게 느껴졌다. 남편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장바구니를 든 손가락 끝마디에 빨갛게 피가 몰렸다. 기우뚱한 그의 걸음걸이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까 마트 안에서 갑자기 진땀이 났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요즘 간혹 그럴 때가 있었다. 운전하다가, 혹은 걷다가도 잠깐만 쉬었다 가자 다. 원인을 알 길이 없었다. 놀란 가슴만 방망이질을 해댔다. 컨디션이 안 좋은가? 낮에 점심은 제대로 먹었는지,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그때였다. 그의 장바구니에서 단무지가 노란 얼굴을 내밀었다.


"저거 나한테 줘."

"뭐?"

"단무지 달라고오-"


화가 난 건 아니었는데 목소리가 크게 나갔다. 그냥 단무지라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몸을 비틀면서 손을 막았다. 쫓아가면 더 빠른 걸음으로 도망치듯 달아났다.


"내놔아아!"


나는 소리를 빽 지르면서 후다닥 따라갔다. 길 위에서 난데없이 추격전이 벌어졌. 뒤에서 봤으면 다 큰 어른들이 뭐 하는 짓인가 했을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 횡단보도 2개를 건너야 했다. 앞에서 보행자 신호가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걸음을 멈춰 섰다. 볼라드 기둥 위에 무거운 짐을 올리고서.


사람들이 이렇게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는 이유는 곧 신호가 바뀌는 걸 알기 때문일 거야. 우리 인생도 그렇잖아. 그러니까 힘들어도 다들 버티고 참아내는 거지. 다시 웃을 날이 올  아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입으론 다른 말이 나왔다.


"다음엔 바퀴 달린 장바구니 하나 살까?" 

"뭐 하러?" 

"왜에, 우리 산책 삼아 마트 자주 가잖아"

"그래, 그럼."     

 

산다는 건 서로의 짐을 나누어 드는 일이다. 덕분에 지나온 길에서 괴롭고 슬프고 힘든 일들을 감당할 수 있었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들도 간직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나누었으므로.


그때마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짐은 항상 그의 차지였다. 그는 물리적으로 나보다 힘이 세니까, 가장이니까, 남편이니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도 지극한 마음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이전까지 나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고,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진심은 마음으로 전해진다고 믿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가 암 판정을 받고 두 번의 큰 수술을 거치면서, 우리에겐 당연한 것이 사라졌다. 대신 소중한 순간이 늘어났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는 당연하지 않다. 우리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도 당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감사한 일이다.


단무지두고 옥신각신 하다 보니 집에 다다랐다. 하늘이 붉어졌다. 하루가 무사히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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