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일기 9
난임 휴직을 시작한 날부터 한동안 아무 생각 없이 놀았다. 병원에서 생리 2일 차에서 5일 차 사이에, 가능하면 2-3일 차에 내원하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일주일 정도 여유가 생긴 것이다. 휴직 앞에 연차를 조금 쓴 덕분에 생긴 자유 시간이었다.
어떤 날엔 D를 꼬셔 대부도에 있는 캠핑장도 다녀오고, 어떤 날엔 혼자 경기도 광주에 캠크닉(캠핑+피크닉)도 다녀왔다. 날이 좋으면 한강에 자전거를 타러 나가고, 비가 오면 하루 종일 집에 콕 박혀 그간 못했던 일들을 몰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휴직을 했다는 실감은 별로 나지 않았다. D가 클라이밍을 하다 허리를 다쳐 이미 두 달간 회사를 쉬고 있던 참이었고, 마침 나와 휴직 기간이 일주일 정도 겹친 상황이었다. 둘이 함께 쉬고 있다 보니 휴직이라기보다는 긴 연휴처럼 느껴졌다. 직장 생활 9년 차에 첫가을방학을 맞은 느낌이랄까.
그러나 꿈같은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의 지시대로 생리 3일 차에 병원에 방문했더니 그날부터 바로 ‘과배란 주사’라는 것을 맞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고날에프’라는 이름의 주사인데 매일 같은 시간에 정해진 용량을 정확히 맞아야 한다고 했다.
주사 맞으러 매일 시간 맞춰 병원에 방문할 수는 없으니 당뇨병 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내가 직접 내 배에 놔야 했다. 주사뿐만 아니라 ‘페마라’라는 이름의 약도 아침마다 먹어야 했다. 약물로 배란을 일부러 더 많이 시켜서 난포를 많이 만들어내어 임신 확률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약 먹는 거야 어려울 게 없지만 주사는 난감했다. 고날에프는 반드시 냉장 보관해야 한다고 했다. 주사기를 싸들고 어디 멀리 다닐 수 없다는 뜻이다. 일단 병원에서 준 보냉 가방에 고이 싸가지고 집에 돌아와 설명서를 반복해서 다시 읽었다. 자가주사 첫날이라 병원이 지정해 준 시간이 있었는데 그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점점 가슴이 떨려왔다. 간호사 선생님이 영상까지 보여주며 주사기 사용법을 자세히 알려주셨지만 막상 나 혼자 그 일(?)을 해내야 할 순간이 오니 멘탈이 나가는 느낌이었다.
주사 시간 10분 전에 일단 주방에 있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 미리 주사 용품들을 늘어놓았다. 본체와 바늘을 결합하고, 주사기의 다이얼을 돌려 내가 맞아야 하는 용량을 맞추었다. 배꼽 아래 왼쪽이나 오른쪽 아래로 3cm쯤 떨어진 위치를 알코올 솜으로 슥슥 닦은 후 왼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뱃살을 꽉 잡았다.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후, 병원에서 알려준 대로 주사기를 직각으로 세운 후 천천히 바늘을 찔러 넣었다. 긴장한 탓에 살을 너무 꽉 잡아서 주사기가 안 들어갔다. 왼손에 힘을 조금 풀자 그제야 바늘이 부드럽게 들어갔다. 주삿바늘이 굉장히 얇아서 많이 아프지는 않을 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생각보다 아프지는 않았다. 약물이 들어가는 느낌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문제는 주사기를 잡고 피스톤을 누르는 내내 달달 떨리는 내 손이었다. 정해진 용량을 다 맞아야 하기 때문에 피스톤을 끝까지 누른 후 약물이 모두 잘 들어갈 수 있도록 5초를 세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1, 2, 3, 4, 5… 후-하. 피스톤을 누른 상태로 천천히 바늘을 빼고 알코올 솜으로 지혈을 했다. 바늘이 들어갔다 나온 흔적은 남았지만 다행히 피는 거의 안 났다.
이걸 맨날 해야 한단 말이지?
… 해야지, 뭐. 별 수 있나.
그래도 한 번 해보고 나니 용기가 좀 생겼다. 매일 아침 7시. 알람을 맞춰놓고 칼같이 일어나 주사를 놓았다. 처음 며칠은 여유롭게 아침 10시에 맞았는데, 주사 시간이 끝나기 전까진 어딜 나가지도 못해서 영 불편했다. 주사 시간을 바꿔도 되는지 병원에 물어보고 괜찮다고 해서 이른 아침 시간으로 앞당겼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그렇게 일주일 정도 지나 고날에프에 익숙해졌다 싶었더니 ‘가니레버’라는 이름의 다른 주사가 추가되었다. 가니레버는 조기 배란 억제 주사라고도 하는데, 내가 이해한 게 맞는다면 과배란을 유도하는 주사를 맞고 쑥쑥 자라나던 난포가 지나치게 빨리 배란되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주사란다. 이 주사는 첫 번째 주사인 고날에프보다 바늘도 두껍고 손에 쥐기 불편하게 되어 있어서 훨씬 아팠다. 가니레버는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어떤 날은 쓰던 주사, 새 주사, 추가된 주사까지 총 세 번 바늘에 찔려야 하는 날도 있었다. 투약 용량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병원에서 채혈까지 하고 온 날은 오늘 하루만 내 몸에 바늘이 몇 개 들어왔다 나간 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아니지. 이렇게까지 해야지, 암. 이게 다 잘 되려고 하는 일인데.
주사를 맞기 시작한 첫 하루 이틀까지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삼일 차에 접어들자 아랫배가 묵직해진 게 느껴졌다. 뱃속에 뭐가 있는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었다. 복수가 차면 이런 느낌이려나. 그래, 그래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나마 가장 비슷할 것 같다. 막 아프다기보다는 불편한 것에 가까운 느낌.
하지만 아무리 경미한 통증이라 하더라도 하루 종일,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다 보니 힘들긴 힘들었다. 스스로 고통에 견디는 역치가 꽤 높다고 생각해왔음에도 말이다. 딴생각을 하려 애썼지만 모든 신경이 아랫배에 쏠려있었다. 내 몸이 낯설다는 생각을 태어나서 그때 처음 해 본 것 같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언젠가 진료실 앞에서 본, 아니 정확히는 목소리만 들은, 한 여자가 생각났다.
그게 언제였더라. 한참 배란 주사를 맞으며 병원을 다니던 때였다. 그때 나는 진료실 출입문을 등지고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등 뒤에서 진료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어떤 여자분의 흐느끼는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깜짝 놀랐다. 흐느끼는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거의 오열하는 듯한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나 말고도 그 앞에 사람들이 꽤 많았는데도 그녀는 쉽게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 애처로워서 덩달아 눈물이 났다. 다른 사람들도 애써 당황한 걸 숨기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남이 우는소리에 따라 우는 걸 들키기는 창피해서 혼자 두 손을 꼭 쥔 채 있는 힘을 다해 참았다. 난임 병원에서, 진료실을 막 나온 환자가 그렇게 통곡을 한 이유가 뭘까… 뭐긴 뭐겠어. 뭔지 몰라도 문제가 생긴 거지.
계속되는 울음소리에 차마 뒤돌아 보지는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데, 안에 있던 간호사가 뒤늦게 소리를 듣고 놀란 듯 뛰어나왔다. 그리고 그녀를 다독이며 소곤소곤 뭔가를 말했다. 얼핏 코로나, 라는 단어가 들렸다.
코로나에 걸렸나? 아님 코로나 증상이 있어서 시술을 중단하게 되었나? 배란 주사를 맞다가 중단하게 된 걸까? 아니지, 초기 단계에서 저렇게 울 리는 없지. 배란 주사를 다 맞고 이제 막 난자 채취를 앞두고 있다가 중단된 걸까? 설마, 배아 이식까지 다 했는데 코로나에 걸려 이후의 검사들을 줄줄이 못하게 된 걸까?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그때까진 시술이 중단되는 상황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매일 아침 혼자 주방에 서서 배 주사를 맞았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심지어 나는 배아 이식까지 도달하지도 못했으니 전체 과정의 반의반도 못 겪어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들 이 과정이 그렇게 힘들다고 말하는지 이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적일까.
울지 마요.
소파에 깊숙이 몸을 파묻고 눈물을 삼키며, 나는 속으로 그녀를 응원했다. 그녀에게 닿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달리할 수 있는 말도 없고 해 줄 수 있는 말도 없었다. 울음을 멈출 수 없다면 그저 옆에 앉아 큰 소리로 함께 울어주고 싶었다. 같이 울어주고 싶은 사람이, 이미 같이 울고 있는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걸 그녀가 알았으면 했다.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할지라도.
한참 후 진정이 되었는지 울음소리는 멈췄고, 나를 지나쳐 비척비척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핸드폰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묘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도 아마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의 고통이 마냥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
그러니 우리 모두 울지 마요. 끝까지 씩씩하게 견뎌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