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임 일기 10
난자를 채취하는 날 아침이었다.
병원에는 8시에 예약이 되어 있었다.
당일 아침만 금식하면 된다고 했다. 어차피 긴장돼서 입맛도 별로 없었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코로나 자가진단 키트로 검사를 했다.
수술 상담실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신분증과 자가 키트 음성 여부를 확인했다.
간단히 시술 설명을 하신 후 나의 양쪽 손목에 종이 팔찌를 채워 주었다.
수술실 앞에서 D와 인사를 했다. 잘하고 오겠다고 했다. 사실 내가 뭘 잘해야 하는지 모르는 상태였지만.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탈의실에 먼저 도착했다.
모두 탈의한 후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간호사가 나를 보고 웃었다.
거꾸로 입으셨네요.
수술복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어디가 앞인지 어디가 뒤인지 헷갈렸다.
멋쩍게 웃으며 다시 탈의실에 들어가서 제대로 입고 나왔다.
탈의실 바로 옆에는 대기실이 있었다.
소파가 두 줄 정도 놓인 아주 작은 공간이었는데 이미 세 명 정도가 팔에 링거를 꽂고 앉아 있었다.
자리에 앉으니 간호사가 와서 신분 확인을 하고 약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지 정신없이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팔에 주삿바늘이 꽂혀있었다.
수술복 차림으로 링거까지 꽂고 앉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대장 내시경조차 해본 적 없는지라 모든 일들이 생소했다.
그렇게 한 십 분 정도 지났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벌써? 간호사가 내 손목을 잡고 안으로 빠르게 이끌었다.
안쪽은 탈의실이나 대기실과는 완전 다른 분위기였다.
좁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몇 개의 수술방들, 그 안의 수술복을 입은 간호사들, 침대에 실려 지나가는 다른 환자들의 모습이 어지러이 시야에 엉켜 들었다.
간호사들이 여기저기서 알 수 없는 말들을 소리쳤다.
흡사 환자가 밀려드는 응급실 같은 분위기였다.
나의 담당 간호사는 내 손목을 꼭 잡고 수술방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어어어, 하면서 따라가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수술방 한가운데에 수술대가 허연 빛을 받으며 놓여 있었다.
어김없이 굴욕 의자였다.
조심스레 올라서서 수술대 위에 눕는데 간호사들 두세 명이 달라붙어서 정신없이 말을 시켰다.
앞으로 당겨 앉으세요, 더, 더, 엉덩이 들썩들썩, 한 번 더 들썩들썩, 다리 올리세요.
그러면서 어느새 왼쪽 팔을 잡아서 손가락에 집게 같은 걸 끼우고 오른쪽 팔은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순식간에 꼼짝없이 수술대 위에 묶였다.
이름과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세요, 마지막 주사는 언제 맞으셨어요, 수술할 때나 먹는 약에 알레르기 반응 있는 거 알고 계신 거 있으신가요, 담당 선생님 성함 말씀해주세요.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뭐지,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왠지 빨리 대답해야 할 것 같아서 0.1초 간격으로 대꾸를 했으나 특별히 내 대답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진 않았다.
마취제 들어가요. 약 들어갈 때 느낌이 조금 아플 수 있어요. 이제 산소마스크 씌워드릴게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잠시 얼굴에 씌워진 마스크의 투명한 부분과 천장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아웃포커싱 느낌으로다가, 서서히.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에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나요?
나를 부르는 걸 알긴 알겠는데 몽롱한 느낌이 머릿속을 맴돌아서 빨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으신가요?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선생님, 왜 이렇게 졸려요…?
여기 병원이에요.
아…
그제야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났다. 내 손목을 잡고 왔던 같은 간호사였다.
그녀는 혈압 재는 기구를 내 팔에 채워주었다.
시술 끝났고요 혈압 좀 잴게요.
네에…
여기 손은 왜 다치신 거예요?
고양이가…
할퀸 거예요?
네에…
몽롱해서 대답이 느리게 나왔다.
수술 전날 우리 집의 센시티브 캣 버찌가 내 위에 올라와서 안겨 있다가 저 혼자 놀라 튀어 오르면서 내 손등을 할퀴었는데 그 상처가 좀 커서 간호사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그렇구나, 잠깐 누워 계세요. 지금 바로 일어나면 어지러울 수 있으니 안정을 취하셨다가 괜찮아지면 귀가하실 거예요. 보호자 같이 오셨죠?
네에…저 선생님 물 한 잔 좀 마실 수 있나요?
아, 지금은 안되고 조금 있다가 나가시면 마실 수 있어요.
네에…
전날 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마셨더니 목이 너무 말랐다.
아쉬웠다.
간호사가 커튼을 쳐주고 떠났고, 그 뒤로는 혼자 천장을 보며 멀뚱멀뚱 있었다.
잠시 후, 나의 담당 의사 선생님이 자리로 오시더니 상황을 설명해주셨다.
난자 9개 채취했고요, 이 정도면 개수는 괜찮아요. 근데…
선생님이 말끝을 흐리셨다. 갑자기 불안해졌다.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서요.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높으면 임신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연구가 계속 나오고 있어요.
그럼 이번에는 이식을 못한다는 말씀인가요?
네. 실패할 확률이 높아서요.
이식을 못하게 되었다는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허무했다.
지난 몇 주간의 여정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내가 뭔가 잘못했던 걸까? 주사도 열심히 맞고 약도 열심히 먹고 병원도 성실히 다녔는데.
그 프로게스테론 수치가 높다는 게… 제가 뭔가를 잘못해서 그런 건가요?
우려를 담은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단호하게 대답하셨다.
아니, 그런 건 아니에요. 쉽게 말하면, 난자는 봄인데 구지 씨가 여름인 거죠.
아…
열흘 뒤에 다시 와서 검사 한 번 해봐요.
네…
수고했어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가시자마자 눈물이 주룩 흘렀다.
혈압 재는 팔 말고 움직일 수 있는 왼쪽 팔로 계속 눈물을 닦았다.
프로게스테론이 뭐길래 수치가 높은 걸까.
여름. 나는 왜 여름일까.
그럼 이번에 채취한 난자는 수정시킨 후에 얼리는 걸까.
바로 신선배아 이식은 못 하는 거니까 다음에 동결배아 이식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다음 달에 바로 할 수 있는 걸까.
다음 달에도 내가 여전히 여름이면 어떻게 되는 걸까.
또 기다려야 하는 걸까.
단 한 번에 성공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그래도 속상한 건 속상한 거였다.
그렇게 한참을 별별 생각을 다 하며 누워 있는데 커튼 너머로 옆 침대 환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랑 전화를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까 마취가 덜 풀려서였다.
응… 응….어… 응…
얼마 후 간호사가 와서 이름을 부르며 그 환자를 깨웠다.
환자는 졸린 목소리로 배가 너무 아프다는 말을 반복했다.
진통제 좀 드릴까요?
아니, 진통제는 좀… 그런데…
지금 아픈 게 1에서 10까지 중에 어디쯤이세요? 4 정도 이상되면 진통제 드릴 수 있어요.
이게… 계속 이렇게 아프겠죠…?
진통제 넣으셔도 몸에 문제는 안 생겨요. 너무 아프시면 진통제를 넣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어요. 넣어드릴까요?
계속 아프다는 환자와 진통제를 써도 된다고 설득하는 간호사의 실랑이가 한참 계속됐다.
어떤 시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배가 저렇게 아플 수도 있구나.
그나마 나는 아직까진 아무렇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울 건 다 울었겠다 가만히 누워있기 심심해서 그런저런 대화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데, 처음에 나를 불러 깨웠던 간호사가 들어왔다.
일어날 수 있겠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했다.
화장실 가서 소변 먼저 보고 혹시라도 혈뇨 나오면 물 내리지 말고 부르라고 했다.
생리 처음 할 때처럼 조금 비치는 정도만 나오거나 안 나오면 그냥 나와도 된다고도 했다.
그 와중에 나는 밴드 없이 노출된 손등의 상처가 걱정되었다.
선생님한테 혹시 여기 후시딘 있나요?
아, 손 다치신 거 때문에요? 화장실 먼저 다녀오시면 준비해 둘게요.
네, 감사합니다.
안심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다행히 혈뇨는 안 보여서 그냥 나왔다.
밖에 나오니 간호사가 손에 약을 발라주면서 물었다.
언제 그런 거예요, 고양이가? 어제?
네, 어젯밤에요.
아휴, 어쩌다가… 저도 고양이 키우거든요.
집사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신이 나서 어제의 사건담(?)을 떠들었다.
아니, 애가 제 배 위에 올라와 있다가 갑자기 뭐에 놀라가지고 뛰어내린 거예요. 가만히 잘 있다가, 갑자기… 그래서 긁혔어요.
아이, 귀여워.
나는 가히 집사 다운 간호사의 반응에 푸하하 웃었다.
난데없이 할퀴어도 마냥 귀엽단다. 집사들이란…
처치를 받은 후 잠시 의자에 앉아 안내문을 받고 설명을 들었다.
난자 채취를 7개 했고(그새 2개 줄었다), 이번에 이식을 못하기 때문에 배아를 동결해야 한다고 했다.
열흘 뒤에 방문하면 되는데 그동안 과격한 운동 무리한 활동 삼가야 하고 일상생활과 산책 정도는 괜찮다고 했다.
복통이 있으면 시판하는 진통제 먹으면 되지만, 혈뇨가 계속 보이거나 출혈이 심하면 병원에 꼭 연락하라고 했다.
인사를 하고 수술실을 나와 대기실을 거쳐 탈의실로 왔다.
배란 주사를 맞던 막바지 때처럼 아랫배가 불편한 느낌이 꽤 컸다. 콕콕 쑤셨다.
생리통 할 때처럼 심하게 아프지는 않지만 온 신경이 배에 쏠려있었다.
왠지 배에 힘주면 안 될 거 같은 불안한 느낌이랄까.
수면마취의 여파인지 머리도 약간 어질어질했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수술실 문 앞에 정수기가 딱 보였다. 물부터 많이 마셨다.
아, 목 말라죽을 뻔했네.
전화를 받고 수술실 앞으로 온 D가 나를 보고 막 웃었다.
잠깐 앉아서 D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D도 이식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실망한 듯했지만 애써 다음에 하면 되지, 하며 나를 토닥여주었다.
옆 환자가 수면 마취에 덜 풀려서 누구랑 전화하는 것처럼 잠꼬대를 했다는 얘기를 D에게 해주다가 문득, 내가 “선생님, 왜 이렇게 졸려요?”라고 했던 말도 잠꼬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간호사가 여기 병원이에요, 대답하면서 피식 웃은 것도 같다.
수면 마취를 했으니까 졸리지, 그걸 질문이라고 했나.
내 얘기에 D도 웃었다.
그래, 그냥 웃자. 이식을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속상해했던 것도 잠시.
우리는 금방 괜찮아졌다. 괜찮아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