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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모 Jan 28. 2023

가가멜의 카레

마법의 묘약

스머페트(Smerfette)를 만들기 위한 묘약 제조법: 


‘별로 안 좋은 설탕과 향신료 조금, 악어 눈물  듬뿍,  새 뇌 한 토막, 고사리 조금, 거짓만 반 토막, 흰색, 고양이의 교활함, 공작의 허영심, 까치의 수다, 암탁의 꽤, 말괄량이 기질, 그리고 물론, 심장을 위한 가장 단단한 돌’


드디어, 매번 골탕만 먹던 마법사 가가멜은 스머프 모양의 점토를 빚어 아주 조심스럽게 묘약에 담근다. 옆에는 헌신적이지만 늘 주눅 들어 있는 고양이 아지라엘이 숨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가가멜의 불량한 염원을 가득 담은, 매력적인 '스머페트'가 마술처럼(?) 태어난다. 여자 스파이를 이용하여 스머프를 일망타진하려는 치밀한 작전이 시작된다. 매혹적인 스머페트에 의해 스머프들은 질투와 경쟁에 눈이 멀고 결국 곤경에 빠지지만, 스머페트의 참회, 또 그녀의 활약으로 결국 가가멜의 위험에서 벗어나고, 스머페트도 스머프 마을의 한 구성원이 된다. 


어린 나의 마음을 신비로움으로 가득 채웠던 ‘개구쟁이 스머프’의 한 장면인데, 1966년 벨기에 만화작가인 페요(Peyo)에 의해 탄생한 스머페트에 대한 것이다.  어느덧 30년이 더 지난 지금, 밉기만 했던 가가멜은 오히려 친숙함으로 다가온다. 이 이야기가 가진 힘인지 아니면 삶의 요술 같은 전개인지는 알 수 없다.


 전례 없는 맹 추위로 어리둥절한 요즘 매스컴에서는 겨울철 난방비 관리를 위한 보일러 사용법으로 유난을 떤다. 보일러 사용을 한지 벌써 40년이 더 되었지만 외출모드는 며칠씩 집을 비울 때만 사용하라는 권장사항은 난생처음 접하는 듯하다.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난방비 걱정으로 시끄러운 밤, 피로 해소를 위해 뜨끈 뜨근한 방바닥에서 등을 지져야 한다는 아내와 바닥에 깔린 두꺼운 요를 두꺼비집인 마냥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줄 모르는 꼬맹이의 애처로운 요구에 우리 집 보일러는 밤새 시골집 '온돌 모드'로 돌아간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에 유난히 목이 마르다. 코도 막힌다. 


토요일 아침, 아내는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방방에 널브러져 곤히 자고 아이들과 하루 종일 아이들을 챙겨야 하는 남편을 위해 반찬을 만들고 있다. 주방과 욕실을 들락날락하는 아내는 손이 모자란다. 자기를 따라나설 듯한 암시를 넌지시 보내는 나. 아내는 얼른 손을 보태라고 종용한다.


오늘 아침은 카레다. 카레를 먹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추운 겨울 면역력 강화에 직빵이고 아이들도 아빠의 도움 없이 스스로 떠먹을 수 있다. 가족의 건강 지키며 남편의 수고를 덜어줄 최고의 묘약인셈이다. 아내는 현명하다. 


벌써 7시를 향하는 시간. 한치의 게으름도 허락지 않고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손부터 씻는다. 그저께 사둔 국거리 소고기를 잘게 썰며 아내는 나에게는 감자와 양파를 까 달란다.  빼꼼히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냉기에 베란다는 언 땅처럼 차갑다. 맨발인 나는 발 시려할 새도 없이 깨금발로 디디며 잽싸게 양파 두 개를 가져온다. 싹이 나기 시작한 양파. 껍질을 까고 반으로  잘린 양파 중심에는 초록색 심이 선명히 보인다. 추운 바깥 겨울과 따뜻한 우리 집. 그 사이에서 양파는 기다림 없이 스스로의 계절을 앞서간다. 나는 초록색 심을 분리해 내고, 스머페트의 하얀 드레스 같은 양파 살만을 분리해서 채 썬다. 


한 번은 회사 단체 1박 2일 행사에서 음식 이벤트를 기획한 적이 있다. 인사팀과 노동조합 멤버들로 이루어진 오묘한 조합. 세 명씩  총 네 개 팀이 각자 요리할 음식의 장을 보고, 정해진 숙소에 모여서 각자의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다는 콘셉트이다.  우리 팀은 인도 출신의 인사부서 상무와 조합위원장이 함께한 이상적인(?) 조합이었는데, 대표 음식은 '카레'였다. 상무님의 아내가 호텔 셰프인 만큼 고급진 오리지널 인도 카레를 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혼자서 다 하겠다는 고집스러운 상무님. 나는 그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잔손만 거들뿐. 이전 직장에서 인도 출장을 여러 번 다녀왔던 터라 인도 정통 카레의 향과 맛이 어떠한지는 경험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코 앞에서 직접 조리하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기에 나의 눈과 코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참 신기하다. 물을 전혀 넣지 않고 카레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물을 대신한 것은 다름 아닌 한 솥 가득하리만큼 잘게 채 썰어진 양파였다. 뭉근하게 끓여내며 양파는 마법처럼 흰색이 사라지고 어느새 죽처럼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직접 가져온 카레, 강황 등의 향료를 더하여 카레가 완성되고 있었다. 인도 전통식 카레의 향이 물씬 풍기는 색다르지만 인상 깊은 맛이다. 물론,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날 이후, 카레를 만들 때면 가능하면 양파를 많이 넣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아내는 안된다고 말린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인도식 카레가 아니라 일본식 카레라는 것. 물을 넣고 끓여야 한다며 아이들도 걸쭉한 인도식 카레가 아닌 묽은 일본식 카레를 더 좋아한다는 것이다. 우리 집 셰프인 아내의 말은 절대적이다. 나는 그저 옆에서 거들뿐, 결정권은 없다. 설거지가 전문인 나는 아직 주방 보조다.


그래도, 넌지시 양파 반 개를 더 썬다. 아주 조심스럽게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잘게 채 썬 양파를 냄비에 마저 넣어버린다. 고양이 아지라엘이 가가멜의 눈치를 살피며 선반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고 있었다.


가가멜은 출근 준비를 마저 하러 가고, 혼자 남겨진 아지라엘은 열심히 냄비를 젓는다. 스머페트의 물약을 젓듯이 카레가 냄비 바닥에 눌러 타지 않도록 열심히 저어 댄다. 중불에서 약불로 낮추어 양옆으로 또 앞뒤로 냄비 바닥을 골고루 등 긁듯이 저어 댄다. 행여 타는 냄새가 나지 않을까 간간히 냄새도 맡아본다.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쉬지도 않고 열심히 그저 열심히 젓기만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 외물(外物)과 자아, 객관과 주관, 또는 물질계와 정신계가 어울려 하나가 됨), 깨달은 사람들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똘망 똘망한 범부들의 눈빛을 바라보며 설법할 듯한 지혜의 한 가닥. 일상을 뛰어넘은 한 차원 높은 세계이다. 


카레를 저으며 나는 어렴풋이 그 세계로 접어든다. 지금 이 순간 이곳, 나와 카레 사이에는 거리도 없고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공간과 시간이 사라지는 듯한 이 느낌. 내가 카레인 듯 카레가 내 생각인 듯, 구분도 필요 없이 그저 카레인지 생각인지를 젓고 있는 행위만이 존재한다. 젓고 있는 팔의 느낌, 코로 들어오는 향긋한 냄새. 카레와 내 팔이 하나가 된 듯한 이 순간을 그저 오롯이 알아차리고만 있다. 


잠시 생각이 이곳을 떠난다. 


설날이 오면 우리 시골에서는 두부를 만든다.  우리 집 외갓집  할 것 없이 명절 전통으로  두부를 만든다. 밤새 물에 불려진 콩을 믹서기로 잘게 갈고, 뜨거운 물을 부어 콩비지를 걸러내고 나면 우윳빛깔의 콩물만 남는다. 비린 듯한 콩물을 팔팔 끓인 후 간수를 지르고 나면, 그 하얗던 오리지널 두유는 어느새 침착하게 서로 엉기면서 순두부가 된다. 식기 전에 틀에 넣어 누르고 나면, 순백색의 단단한 두부가 완성이 된다.


나의 생각이 도착한 때는 한 부엌 가득 불이 타고 있고 콩물이 솥에 눌러 타지 않도록 긴 나무 주걱으로 열심히 콩물을 젓던 바로 그때였다. 어머님은 솥 뒤쪽에 앉아서 총감독을 하시고, 나는 불 아궁이 근처에서 긴 나무주걱으로 끓어오를 때까지 하염없이 콩물을 젓고 있다. 다 큰 아들내미 팔이 아플까 걱정하시어 한 번씩 쉬라고 말씀하시지만, 나는 극구 괜찮다며 계속 젓고만 있다. 


왼쪽 다리에 느껴지는 아궁이의 뜨거운 불기운, 팔의 긴장감, 솥 바닥에서 느껴지는 미끌미끌함, 콩물이 가득한 솥뒤에 앉아 계신 어머니. 손 시린 고향 산골의 오후 햇빛 아래, 제발 끓어오르길 바라는 간절함을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에 보탠다. 한 번씩 지나가는 돌개바람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포근하다고 우겼을지도 모르겠다. 내내 오고 간 소소한 대화는 희뿌연 김처럼 스러졌지만, 오후 내내 우리를 감싸고 있던 정겨움과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뜨끈뜨끈한 두부를 나눠먹던 온정은 한 폭의 두부풍경이 되어 내 마음에 또렷이 남아 있다. 


카레로 다시 올라온 나는 이번에는 느닷없이 마녀로 향한다. 어두컴컴한 주방에서 주문을 외우며 신비한 묘약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솥을 젓고 있는 마녀. 영락없는 지금의 내 모습이다. 사악하고 추한 이미지 가득한 마녀이지만 지금 나처럼 정성을 다해서 냄비를 저었으리라. 냄비를 젓고 있는 동안에는 고귀하고 성스러운 물아일체의 마음으로 바라고 또 바랬으리라. 마녀가 나쁘기만 했으랴. 평일 식사를 만들기 위해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고, 주말이 되면 야외로 소풍도 나갔을 것이며, 토끼 같은 자식들도 있었으리라. 어쩌면 마녀는 그 옛날 어느 고약한 남성들에 의해 탄생했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 여느 평범한 어머니나 아주머니에게 누명을 씌운 막장 드라마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가가멜이 형형색색의 재료들로 화려한 스머페트를 만들듯, 나 또한 흰색, 초록색, 노란색, 붉은색을 섞어가며 환상적인 카레를 만들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것과 신비한 묘약을 만드는 것, 정말 공통점이 많다. 이 둘 모두는 마음 어린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기에 절대 한눈을 팔 수 없다. 또한, 같은 곳에서 자라고 키워진 적이 전혀 없는 각종 서로 다른 재료들을 잘 배합할 때에만 전혀 새로운 멋진 것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들은 평소에는 이목을 끌지 않는다. 참으로 신비롭고 고귀한 일이 매일의 우리 집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와 나의 아이들, 그들을 위해 아내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을까. 심지어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저 당연한 듯이 여겨진 채로. 


카레에 경이로움과 감사함, 미안함과 사랑을 더하여 젓는다.

'여보, 한 번만 봐줘요.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위대한 가가멜 (The Great Gargamel) 셰프의 최종 확인과 승인을 얻는다.


묽은 듯 걸쭉한 듯, 그 오묘하며 애매모호한, 오직 경험과 느낌으로만 깨닫게 되는 '적당한' 선에서 오늘의 묘약, 요술 같은 카레가 마무리된다. 묘약을 먹고 아이들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해지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쿨하게 현관을 나선다. 


(참고로, 한 때 아내의 별명은 '가가멜'이었고, 또 한 때 어느 선배가 나를 보면 ‘아지라엘’이 떠오른다고 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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