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두 할 수 있어
처음 내가 살 집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뭐랄까, 마침표 세 개랄까. 이 집을 알아보기 전에 봐 둔 집도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먼저 본 집이 더 마음에 들었었다. 그 집의 소유주인 딸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참이나 된 집에 유품들을 애정도 없이 방치하면서 1년 치 세로 250만 원을 불렀고, 들인 지 몇 년 안 된 냉장고는 막내딸이 가져가겠다 했다. 서울 물정에 익숙했던 당시에는 폐가를 빌려주는 조건이 그만하면 괜찮지 않나, 생각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상태에 비해 정말 비싼 거였다) 집을 소개해 주신 이웃 분께서도 그들이 너무 비싸게 부른다고 펄쩍 뛰셨다. (정말 감사하게도) 직접 나서서 그 집 대신 두 번째로 알아봐 주신 집은 1년에 50만 원. 나는 요목조목 볼 것도 없이 그 집으로 하겠다 했다. 좀 더 괜찮아 보였던 이전 집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면서 항상 돈이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는 것도 억울했으나, 급하게 한 달 안에 회사 일을 정리하는 와중에 주말에 집을 보러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는 것은 더 이상 무리였다. 내 처지에 그만하면 되었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궁지에 몰리듯이 한 선택은 가끔 생각지도 못한 흥미로운 경험의 기회를 준다. 가령, 혼자서 씩씩하게 폐가를 고쳐보는 일과 같은.
집 고치기를 위해 할당한 금액이 200만 원인 것에 큰 의미는 없었다. 당시 가지고 있던 저축 금액에서 1년 치 생활비를 제하고 나니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고, 쓰러져 가는 집의 상태로 보아 100만 원은 택도 없을 듯싶고 200만 원을 넘기자니 아예 사들인 집도 아닌데 어쩐지 좀 아깝게 느껴졌다. 예산안에 결재 도장을 찍듯 마침 통장에는 마지막 월급 200만 원 남짓한 돈이 들어왔다. 나는 어떤 꾀도 굴릴 새 없이 곧장 작업에 착수했다. 왜, 드라마에 자주 나오지 않나. 마음에 가진 것을 모두 탕진하고 덧없는 희망마저 버리러 대교 위에 서서 휘청거릴 때 마침 “띠링”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전송되고, 그 어떤 이는 자신을 기다린다는 딸의 문자에 이내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장면 같은 것. 이 집은, 그러니까 이 흥미롭고 두려운 여정의 시작은 내게 그 메시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겁이, 없었다. 오히려 일말의 희망에 가까웠다.
작업지시서라든가 일의 방법을 알려줄 조력자는 없었다. 나는 이 대책 없는 공사의 유일한 설계자이자 작업반장이 되었다. 평소 인테리어와 살림살이에 관심이 많아서 세입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셀프 인테리어에 자주 도전하곤 했지만, 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집은 스케일이 달랐다. 인테리어라기 보단 공사, 그러니까 집 꾸미기보다는 집 고치기 인 것이었다. 내가 혼자 해내야만 했던 일의 범위는 꽤 넓었다. 철거에서 시작해서 단열재 시공, 도배와 장판 깔기, 시멘트 작업(일명 공구리치기), 페인트칠과 퍼티 마감, 수도관 교체 및 연장, 가벽 세우기, 타일 깔기, 조명 교체 등. 하다 하다 나중에는 목재를 사서 가구까지 만들었다. 하루 여덟 시간 이상을 매달린 굵직한 공사는 2개월이 넘게 걸렸고, 이후 집이 사람 사는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2개월이 더 걸렸다.
“워매 여자가 타이루를 다 붙이고. 손재간이 좋당게.”
“글씨 이 이가 전기도 막 만지드라고.”
오래 묵은 빈집 냄새를 없애기 위해 열어둔 문으로 소일거리를 마친 어르신들이 드나드셨다. 한산한 오후에 동네 할머니들은 이 조용한 작업장에 오셔서는 나도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작업 진도를 체크하셨다. 서울에서 온 쪼끄만 여자애를 신기한 듯 한참 들여다보시다 얘기를 나누시곤 돌아가셨다. 나의 능력치가 공개(?)되면서 나는 동네에 맥가이버가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순간적으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나의 분주한 모습이 그려졌다.)
했던 일을 짧게 회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척척 적어보니 괜히 쉽게도 느껴지지만 사실 그중 몇 가지는 두 번 다시는 못할 것 같은 일들도 많았다. 처음 해 보는 일을 하기 위해선, 그것도 작은 결점도 용서하지 못하는 강박을 가진 까탈스러운 인간이 바라는 완벽에 가까워지기 위해선 더욱이 작업 전에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했다. 그 와중에 발견한 사실들은 중학교 때 배운 <피타고라스의 정리>보다도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법한 실용적인 것들도 많았고 몇 가지는 흥미롭기까지 했다. 가령, 타일 접착제는 벽에 붙이는 것과 바닥에 까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나 수도관을 연결하는 나사에도 성별이 있었고(암나사, 수나사), 파이프의 종류에 따라 특징과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 또 그에 따라 파이프 컷팅기도 다르게 선택해야 한다는 것, 단열재의 두께와 종류에 따라 가격은 터무니없게 0의 개수를 바꾼다는 것, 퍼티의 균열을 줄이기 위해선 얇게 여러 번 덧발라야 한다는 것과 같은 노하우까지. 나중에는 직접 몸으로 체득한 나만의 주의사항까지 생기기도 했다. 예를 들면 ‘천장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전선 작업을 할 땐 뇌졸중의 위험이 있으니 옆에 사람을 둘 것.’이나 ‘체지방률 26퍼센트의 여성이 물이 새지 않을 만큼 수도관 나사를 조여야 할 땐 홧김에 욕이 나올 수도 있으니 미리 근육을 충분히 만들어 둘 것.’과 같은.
이 공간이 폐가에서 집이라는 이름으로 옮겨갈 때쯤 나도 헤진 작업복을 몇 벌 가진 꽤 그럴듯한 집수리 전문가가 되어갔다. 창을 내거나, 보일러를 깔아보지는 못했지만 이런 기세라면 집을 지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장판의 이음새엔 약간의 본드 자국이 남았고, 벽에는 뚫다 만 드릴 자국도 있지만 그것조차 나의 완벽이 되었다. 나는 머리카락에 하얀 페인트 자국을 남긴 내 모습이 마음에 들어 페인트가 묻은 머리칼을 자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아마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멋진 여자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혼자 힘으로 집 고치기 앞에 ‘여자’라는 말을 굳이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 수식으로 누군가는 미뤄뒀던 일을 해 볼 용기가 날지도 모르니까.
그 시기에 나는 메모장에 ‘마흔 살에 집짓기’를 적어 넣었다. 이루어질까? 마흔의 나, 그때까지도 스물여덟에 체득한 집수리 요령과 주저하지 않을 용기가 남아있기를.
한강 다리 위에서 문자 메시지를 받고 발걸음을 돌린 사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드라마 작가라면, ‘그 사내는 다리를 지나 딸에게 가까워지는 동안 절망과는 멀어졌다.’ 고 쓸 것이다. 마침내 기다리는 이에게 돌아갔을 때 또 어떤 새로운 절망을 견뎌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생의 의지가 불타올랐고, 모든 발걸음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고 쓰겠다.
한창 엉망으로 수리가 계속된 그날의 계절은 늦가을에 닿아 있었다. 남쪽이라 그런가, 겨울을 앞두고도 낮 동안은 볕이 무척이나 따스했고 어둠의 농도가 0에서 막 10을 향해 가기 시작할 때는 선선한 바람도 함께 짙어졌다. 나는 평소처럼 먼지와 거미줄을 잔뜩 뒤집어쓰고, 목장갑 손등 부분으로 잠시 멈춘 땀을 가볍게 훔쳤다. 이삿짐들 사이에서 나무 스툴을 하나 찾아서 처마 밑에 놓고는 맥주를 마셨다. 뻐근한 허리와 퉁퉁 부은 종아리의 긴장이 턱- 풀린다. 너무나도 완벽한 휴식이었으나 아아, 담배를 필 줄 알았다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