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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Aug 03. 2021

아레카야자를 또 샀다

나만의 주기를 돌기 위해



나의 새해는 항상 1월 23일에 시작된다. 굳이 1월 1일의 해돋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생이 다른 이들과 일률적으로 시작되는 것이 싫은 반골 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나의 생의 주기가 그날에 시작됐기 때문이다. 그렇게 2021년 서른 번째 생일을 맞으며 나는 꽤 비장했던 것 같다. 서른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암묵적인 압박과 나의 처연한 시골살이가 교차되며 이 철없는 일상을 좀 더 오래 누리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3과 0 사이에 무수히 많은 생각을 끼워둔 채로 나만의 새 주기를 시작했었다. 그러나 2월이 되면 한산해지는 헬스장의 풍경처럼 나의 생각들은 금세 느슨해졌다. 짧은 봄이 다녀가는 동안 나의 계절도 지난밤보다 더 늙어가고는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점점 나이를 잊었다.





아주 미묘하게 달라지는 하늘빛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연속에 크게 티 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변해갔다. 좋아하는 7만 원짜리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조금 읽다 보니 달력은 8월이다. 실컷 놀다 까무룩 낮잠에 들었는데, 잠깐 사이 해가 다 져버린 어두운 방에서 깬 아이처럼 억울하고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니 난 아직 글도 몇 자 적지 못했는데. 체지방 감량, 프리랜서로서의 업무 능력 향상 같은 계획들도 죄 손을 빠져나간 모래 같은데, 시간은 어째서 이다지도 부지런히 쌓인 것인가.


급히 거울 속의 내 모습을 점검하다 갑자기 낯섦이 느껴졌다. 세수도 잘하지 않으면서 양심 없게 늘어난 모공이 속상할 건 또 뭐람.



"난 아직 젊어."



최면을 걸 듯 습관처럼 뱉던 말도 어색하다. 헛헛한 기분을 달래려 괜히 마당 텃밭을 서성거려 보는데 옆집 할머니가 나오신다. 그녀의 머리칼은 어쩐 일인지 여전히 뽀글거리고 검다. 나는 빠르게 새 염색을 눈치채고는 예쁘다는 말과 엄지 두 개를 그녀에게 보냈다. 나는 가끔 얌체처럼 누군가의 늙음에서 나의 젊음을 위안 받곤 했는데, 오늘은 그녀의 새 머리단장에 그마저도 실패인 듯하다. 바람을 유유히 타고 넘는 감나뭇잎을 보며 나만 빨리 감기 당한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윽. 분하다,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인데 어째서 큰 모공으로 선명히 자취를 남긴 것이냐구.



-



우리 집엔 일곱의 서로 다른 식물이 산다. 나는 특히 아레카야자 화분을 자주 말려 죽이곤 하는데 그럼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아레카야자 화분을 집에 들인다. 키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잎사귀의 가벼운 몸짓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잊지 못하고 다시 사는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또 하나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무자비함을 반복하면서도 심미적 집착을 내려놓기가 참 어렵다.





나는 아레카야자를 주문하는 마음으로 책상에 앉았다. 메모장을 펼치고 따뜻한 커피를 내려 가져온다. 아껴 듣는 노래도 잔잔하게 틀어놓는다. 나름대로 경건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다. 번번이 말려 죽이는 야자의 줄기 같은 줄 간격 사이에 2021년의 나머지 3분의 1을 채워보기로 한다. 언제나 그렇듯 사각사각 글 쓰는 소리는 스무 음절을 넘기지 못하고 멈추었다. 길고 긴 생각이 손을 떼지 못하고 누르고 있는 마침표 위에서 점점 진해진다. 연필이 아니라 잉크였다면 테이블보까지 잉크가 번져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난 도대체 뭘 하고 싶은 사람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확장되면 맥주가 당긴다. 맨 정신으로 스스로의 앞날을 점칠 수 없다는 건 꽤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일이다. 맥주를 마시는 것 대신 나는 차분히 계좌의 남은 잔액을 확인했다. 돈은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한정 지으니까, 모든 일에 선행된다. 그러한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늘 가난이 따라붙었던 내 삶에선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순응보다는 적응이라 느낀 지 오래되었다. 그렇게 계좌를 확인하곤 몇 가지 키워드를 글자로 남겨보았다.



공부. 성장. 타인으로부터의(?) 인정. 음... 연애. 일(?)



분야를 막론하고 뭔가 떠오르지 않을 땐 우선 명료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게 필요하다. 나는 이 방법을 자주 쓴다. 적고 나니 이 명사들의 나열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공부', '연애'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한 반면에 '자급자족'이라든가 '쉼'이라든가 하는 단어는 사라졌다는 것. 단어의 순서 역시 바뀌었다. 2년 가까운 귀촌 생활을 거치며 나는 정말 많은 부분에서 욕구가 변화한 것 같았다. 마침내 변태가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슬슬 고치를 깨고 싶어진 것일 수도 있다. 적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나의 욕구를 확인하며 나는 현실과 이상을 좁히기 위해 며칠 좀 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고치를 깬다는 건, 날개를 처음 꺼내는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나는 몇 달 만에 또 아레카야자를 주문했다. 그 초록의 생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누르스름하게 시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아깝지 않은 값을 치르며 생명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누군가 옆에서 아레카야자에 물 주는 법을 알려준다면 오래도록 싱싱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노하우를 알려준다고 해도 키우는 건 순전히 내 몫이니까. 그래도 이번엔 좀 더 오래 키워보고 싶은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아레카야자 키우기]를 검색해 봤다.



비료를 많이 요구함
중간 이상 높은 광도(800~10,000 Lux) 요구되어 거실 창 측이나 발코니에서 키우는 것이 좋음
토양 표면이 말랐을 때 충분히 관수함
                                                                                          _출처 국가농업기술포털 농사로



흠, 관리 난이도가 '보통'이라는데. 나에게 아레카야자의 관리 난이도는 '매우 높음'이다. 관리에 능숙하지 않기도 하지만 놓인 습도와 창의 크기, 그 모든 조건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비료를 많이 요구함'이란 부분은 좀 더 오랜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무엇을, 얼마나 비료로 줄지는 보다 신중해야 한다. 과량의 비료는 오히려 독이 되곤 하니까.





아레카야자가 시들 것을 알면서도 다시 들이는 것은 신년 다짐처럼 지켜내지 못할 계획을 또 세우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미안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온전히 내 몫으로 키워가는 연습이 꼭 필요하다. 물 주기는 경험이니 능숙해질 때까지 숱한 야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중요한 건 아레카야자를 다시 집에 들이는 일이다. 내가 제공하는 환경에서 식물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관찰하며, 간혹 양질의 비료도 약간 주면 더없이 좋겠지. 그러니 우리는 아주 조금씩 다른 자기만의 주기를 돌자. 시든 야자를 다시 사자. 8월은 그래, 그러기에 아직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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