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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찰나 Aug 01. 2021

내가 당신을 환대하는 이유



내가 다 버리고 아무도 없는 시골에 간다고 했을 때 친한 친구A는 “진짜. OO이니까 한다.”라는 말을 했었다.



나니까 한다라.


나는 그 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실은 나도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덜컥 귀촌이라는 결단을 하고 사뭇 겁이 났었는데, 왠지 그 말을 들으니 ‘나답게’ 잘해 낼 것만 같았다. 나의 기운을 차려주는 것들은 대개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말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말을 건네주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가끔 유치(?)하게도 나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편협한지 친구들과 경쟁하듯 이야기하곤 한다. 이 경쟁의 승패는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것이지만 왠지 나는 이기는 쪽을 선호한다. "난 6개월 간 서로 연락하지 않으면 연락처를 지우는데?"에서 보통 승리는 내게로 기운다. 그저 친구사이라도 굳이 서로가 아니어도 되는 관계라면 애써 친구 수를 늘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아니다 싶으면 끝맺음을 잘하는 편이라 '칼 같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내 주위에는 오래도록 서로의 시간을 차곡히 쌓아온 인연들이 많다. 100을 넘지 못하는 나의 연락처 목록에 그런 사람들만 있다는 건 생각보다 더 든든한 느낌이다. (물론 그 목록엔 동네 치킨집 번호라든가, 첫사랑의 바뀌기 전 번호라든가 하는 것들도 간혹 어울리지 않게 껴 있다!)





좁디좁은 관계만을 맺고 있는 것에 비해 의외로 우리집엔 손님이 자주 들고 난다. 서울을 기준으로 하자면 4시간이 넘는 거리인데, 친구들 대부분이 내가 귀촌을 한 첫 일 년 사이 방문을 해서는 이곳에서의 내 삶을 요목조목 점검하고 갔다. 나의 날들이 평안한 지, 그래서 마음은 좀 가벼워졌는지 물어가며, 보일러도 없고 온수도 나오지 않는 허름한 시골집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 며칠을 보내고는 조용히 돌아간다. 나는 손주를 배웅하는 할미의 마음으로 언제나 그들이 탄 차가 각자의 집으로 가까워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준다.


내가 내려온 지 두 달 만에 가장 처음 우리집을 방문했던 친구 부부는, 집수리로 이삿짐도 풀지 못한 공사판 같은 집에서 무작정 시작된 나의 시골 생활을 적나라하게 체험했는데, 얇은 침낭으로 한 겨울의 냉기를 버티다 숙취만 안고 돌아갔다(웃음). 냉장고도 없을 때라 나는 말도 안 되는 음식을 대접해야 했고 밤에는 의자도 없이 나가 앉아 잔가지를 태우며 허접한 불멍을 때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이 내게 언제나 유쾌하게 떠올려지는 것은 순전히 그 누구도 아닌 바로 그들이 그 시간 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을 떠나며 지독히도 나를 홀로 내버려 둘 작정을 했었지만 그렇게 얼떨결에 첫 손님을 맞고 이후로 겨울을 쭉 혼자 보내는 동안 나는 가끔씩 서울과 친구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뭐해? 별일 없으면 맥주나 한사바리 후루리탁탁 하자. 이모네로 나와욥."



하며 암호 같은 짧은 통화를 끊고 슬리퍼를 끌끌 차며 동네에서 맥주 한 잔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서였다. 내가 그리움으로 품은 서울은 그 어떤 편리와 세련도 아닌 그런 소소한 여름밤의 동네 풍경이었다. 그러나 오로지 내가 이 지역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먼 거리를 선뜻 찾아와 주는 친구들이 있어 나는 적절히 외롭고 이따금씩 연결되는, 다분히 행복한 여름을 보내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전과는 달리 이곳에서의 나의 살림도 제법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마침 휴가철이었기 때문에 1-2주의 간격을 두고 연이어 친구들이 나의 시골집을 찾아왔다. 


내 나이가 한 자리일 때부터 두 자리가 되어 앞자리를 바꿔 끼는 동안 내내 나의 친구였던 아이들부터, 나를 마지막까지 배웅해주던 화곡동의 어른들, 열 살 차이가 나는 첫째 조카와 그녀의 발랄한 친구들, 퇴사 후에도 남아 있는 전 직장 동료, 취업 준비를 하다 만나 술친구가 된 혼성그룹, 제주 워크숍에 참가했다 인연이 된 그와 그녀, 지난 5년간 나를 가장 가까이에서 봐 온 동네 친구들까지. 손가락으로 몇 번 꼽아보면 다 셀 수 있을 숫자지만 그들의 나이는 10대부터 50대까지로, 성격도, 가치관도 다양하다. 나는 어쩌다 어울릴 듯하면서도 안 어울리는 조합의 그들과 친구가 되었나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그냥 서로가 아주 약한 자석처럼 슬슬 끌리는 부류가 있다.





우리집에 와도 되겠냐고 연락을 받고 나면 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대여섯 가지의 밑반찬을 만들어 두고, 깨끗한 침구와 수건을 챙겨두는 것으로 환대를 준비한다. 취향에 맞게 지역에서 가볼 만한 곳을 리스트업 하고, 음식 재료를 준비하면서 오이나 애호박 같이 내가 모르는 기호가 생긴 건 아닌지 미리 파악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그들에게 "보고 싶었어. 그러니 어서 와."라는 말을 대신하는 것이다.


내가 그들과 인연이 된 것이 특별한 이유 없는 자연스러운 끌림이었다면, 이토록 내가 환대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그들이라는 것에는, 너무도 분명한 이유가 있겠다 싶다.


아마도 나는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안정적인 눈빛을 좋아하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간다, 시골! 뭐 대충 이런 얼렁뚱땅 식의 선언을 했을 때 주위에 그 누구도 놀라거나 나를 말리지 않았다. 모두가 친구A의 반응과 비슷했다.



'그래 너,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지.'



남다른 길을 가는 나를 보는 그들의 눈빛은 오로지 그것이 전부다. 그런 편안함이 별난 나를 보통의 사람으로 만들어준다. 게다가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내가 '(특정) 누구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어서 만큼은' 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인을 받게 된다. 나만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 무뚝뚝하고 서툰 내 표현에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하고 얘기해주거나, "네 삶이 아주 멋진 방향으로 가고 있어."라며 격려를 해주는. 그렇기에 나 역시도 그들의 고유한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그것은 서로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의 정도는 아니다. 우리는 잔잔한 마음으로 서로가 가진 생의 마디를 서두르지 않고 오래도록 짚어보아야 한다.





앞서 스스로를 유배지에 보내 놓았다고는 했지만, 유배지치곤 나의 촛대 위에는 언제나 먼지 대신 촛농이 흘러 있다. 나는 홀로 켜지고 꺼지기를 쉼 없이 반복하는 것인데, 그 간격은 또 어찌나 적절한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이따금 당신이 올 때, 어둡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초를 켜 두는 동안 나는 동시에 스스로를 환대하는 느낌을 받는다.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위해 밝힌 불은 내게도 따뜻함이 된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갖가지 선명한 이유들로 나는 당신을 환대한다. 그리고 헤어질 때는 언제나 그랬듯 오래도록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오늘 또 누군가를 배웅하며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시골집 처마 아래서 가만 생각을 했다.


나의 다름이 곧 너와 같음이라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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