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일하던 시간 내내 기쁜 일에 웃으며 슬픈 일에 울었다.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했기에 믿고 따랐다. 친구들과 지인들은 이상한 곳이라고 빨리 탈출하라 했지만 가스라이팅당한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항변했다. 이상한 곳 아니라고.
얼마 걸리지 않았다. 퇴사한 즉시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되리라는 것을 깨닫는 데까지는
같은 바운더리안에 들어있다는 소속감은 꽤 큰 방어막이 되기도 한다. 그 바운더리를 벗어나니 서로를 지켜주던 방어막은 비눗방울처럼 사라졌고 그 자리엔 부끄러운 허물만 남아있었다. 자리에 없는 사람은 잘못 처리된 업무의 잘잘못을 떠넘기기에 꽤 좋은 대상이 되었다. 자리에 없으니 말도 없다. 안 풀리는 일들은 모두 내 탓이 되어가고 있었다. 술이 한 잔 들어가게 되면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진짜 얘기가 나오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 분위기는 상대방이 내뱉는 말을 은밀하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너한테만 하는 말인데, 이번에 그 사람.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른거야. '
그 이야기는 퍼지고 퍼져 나에게까지 들어오게 된다. 나는 어느새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퇴사하는 이유는 말했다. 쉬어라는 병원의 권고가 있었기에 그만둬야할 것 같다고. 호르몬 약을 먹고 있기에 감정기복이 있을수도 있다고. 그들에겐 정확한 병명으로 진단받은 내 몸상태보다 호르몬 약이 더 매력적인 이야기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그 조직에서 정신병자로 남겨졌다.
인간적으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가 원망스러웠다. 배신감에 길길이 날뛰었다. 모든 감정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니 그 자리에는 점점 이성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인간적으로 못난 그들이 그 못난 본성을 드러내었을 뿐이라고. 우리라는 가림막에 가려 보지 못했을 뿐. 서로의 본성을 숨기고 있었을 뿐.
직장이라는, 우리라는 옹벽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세워져있다. 눈 높이를 높이면 그 벽 뒤의 세상이 눈에 보이더라. 그들이 나를 그렇게 대하는 이유는 우리를 묶어줬던 옹벽의 높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냥 그 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다. 중요하지 않고 언제든 쉽게 넘어설 수 있는 사이.
잔인하게도, 부당한 처사에 대해 우리는 분노해야하지만 깨달아야한다. 우리의 위치를. 그 조직이 생각하는 나의 가치와 쓸모의 범위를. 어른이 되면 당당하고 멋있게 살 줄 알았지만 그 이면에는 냉정하게 자신의 위치를 깨닫고 자신의 힘을 키우며 30년 넘는 레이스를 펼치는 고독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