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수 Apr 20. 2023

봄을 나누다

分-낮과 밤의 길이가 같음

 春分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시기.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에도 해가 길을 비춘다. 땅에 슬며시 돋아난 파릇한 솜털이 이유 모를 기대를 부추긴다. 새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새들의 지저귐이 유난히 부산하다. 세상이 녹 빛을 띄우고 환한 꽃이 필 것을 예감한다. 어둡고 차가운 겨울을 지나 드디어 봄이 도래했다. 


 며칠 전, 친한 언니 결혼식에 다녀왔다. 신랑과 신부는 오랜 연애를 종 찍고 백년가약으로 맺어졌다. 대학에서 처음 만나 곧 서른이 되는 둘은 서로에게 사랑이자 청춘이다. 축가에 맞추어 둘의 사진이 슬라이드 쇼로 화면에 비쳤다. 앳되고 어리숙한 모습부터 지금의 성숙한 모습까지 길다면 긴 시간이 함축되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자신의 청춘을 지켜봐 온 사람. 가장 풋풋하고 패기 넘쳤던 시절을 겪은 이와 여전히 함께한다. 그 시간을 아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축복해 주었다. 봄에 만나 봄에 결혼하는 아직도 봄철인 그네들을 응원했다. 春이 오래도록 머무르기를 깊이 바랐다. 


 청춘에도 春이 들어간다. 靑春. 새싹이 돋는 봄철.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스물다섯 인 지금도 청춘인데 나는 청춘이라 하면 스물이 생각난다. 서른이 되면 스물다섯 살 적을 떠올리려나. 

 스무 살의 나는 용감무쌍하고 저돌적이었다. 멋모르고 무모했다.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현재를 맞이할 만반의 태세만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즐거웠다. 매일이 새로웠다. 가슴이 뛰어야 살아있는 것 같았다. 

 지금 내게는 아무것도 아닌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그때의 나는 지구에 떨어질 운석처럼 고민했다. 기숙사에 보고하지 않고 외박한 일, 까먹고 하지 않은 과제, 남자친구의 연락 부재 같은 것들. 대부분 코앞에 닥친 걱정들이었다. 집안, 진로 등 꽤 중요한 문제들도 있었지만 깊이 골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청춘 하면 스무 살을 떠올리나 보다. 사소한 일로 머리를 싸매고 정작 중요한 것들은 돌보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홀가분했었다. 그때부터 미래를 대비했더라면 지금 더 좋았을까 생각해 봤다. 자격증과 자기 계발에 힘썼으면 조금 더 다른 삶을 꾸릴 수 있었을지도. 그런데 불과 5년 전의 내가 굉장히 철없게 느껴진다. 그때 막무가내로 살지 않았다면 언제 그래 봤겠는가. 아무래도 별 소용없지 싶다.


 결혼식이 끝나고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빼놓을 수 없는 내 청춘의 아이콘들.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겪은 친구들이다. 아직 그 과정을 벗어나지 못한 친구도, 원숙해져 제법 어른 분위기를 풍기는 친구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대학 시절 자주 가던 카페에 그 친구들과 모여 앉으니 다시 대학생이 된 것 같았다. 잠시 스무 살로 돌아가 그 시절만의 春을 맛보았다. 

 술집을 전전하며 하얗게 새웠던 밤들, 우리끼리 박 터지게 싸운 일, 좁은 차에 다닥다닥 끼어 앉아 훌쩍 떠난 여행, 옆자리의 그 오빠, 다사다난했던 사건사고, 선선한 밤 운동장에서 마시는 맥주 맛, 교수님 성대모사, 헤어진 캠퍼스 커플. 추억이 새록새록 피어났다. 


 이야기를 나누며 동기들 얼굴을 오래 살피다 왔다. 나의 청춘을 지켜보아 준 사람들. 그리고 내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청춘들. 영원히 젊을 수 없지만 젊음을 영원히 간직하게 해주는 벗들이 있어 기뻤다. 가능하다면 오래도록 푸른 봄을 품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가는 버스에서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았다. 98년도에 만난 두 남녀의 청량한 청춘이 담겨있다. 맹렬히 부딪히며 아파하고 사랑한 이야기. 삐삐를 치는 그들에게 스마트폰을 쓰는 내가 오롯이 공감하는 바는 시대를 뛰어넘는 청춘의 아련함이다. 영원한 것은 없고 전부 흘러가지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여주인공 희도의 대사가 다가와 박혔다.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 둘 수 없지만 우리는 기억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가진 것 없고 불안정했지만 티 없이 맑게 짓던 웃음들, 소녀도 여자도 아닌 시기 그렇기에 순수했던 사랑. 분명 상처와 고통도 있었지만 망각은 추억만 남기고 홀가분히 덜어가 주었다. 


 결혼식에 다녀와서 그런 것일까. 봄비가 추근거렸는지 드라마 속 희도와 이진이가 마음을 말랑하게 만들어서 인지 문득 연애가 하고 싶어졌다. 나의 지금, 스물다섯의 청춘을 함께 기억해 줄 이가 갖고 싶다. 서로의 청춘, 서로의 푸른 봄을 나누고 싶다. 

 靑春과 春分. 완연한 봄이다. 

작가의 이전글 죽은 강아지를 안고-박노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