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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준 Apr 19. 2020

비 오는 날의 이방인

난필. 16

 비가 천천히 모든 것들을 다른 온도로 물들일 때면, 물들어 가는 반대편에는 항상 네가 서 있기에 그 선명치 못한 경계에서 망설이는 내가 있다. 물감처럼 번지는 불편한 고요가 낯설어서, 그렇다고 너를 물들일 자신도 없는 나는 이내 지워지는 편을 택한다. 지워져 가는 것들 편에는 항상 내가 서 있다. 나를 위해 나를 소거하는 일은 현실과 내부의 긴장, 그 사이 어디쯤 일이지. 비가 오는 날은 내가 없고, 지워지는 일부분은 누군가에게는 전부인 일이다.


 차가운 문장들의 나열로 감정을 해체하고 나면, 퇴고는 여지없이 불필요한 마음들을 잘라내어 두드린다. 창작의 고통보다는 고통으로 인한 창작이 더 잦기에 차라리 과정의 고통은 언제나 반가운 편이다. 조각내고 잘라 붙여진 마음으로 감정 없는 눈물이 흐르면, 비로소 비 오는 날의 고요가 완성된다. 회색빛 경계에서 이방인이 된다.


 무채색의 눈으로 그리는 포에지는 바람에 굳건한 회색 나무들과 나무껍질같이 까끌거리는 빗방울이 있다. 밖과 안을 나누는 창문은 거울이 되어 낯선 이방인을 비추고 그 속에는 흔들리는 것들이 있다. 평범한 박자에 맞춰서 살아가는 일은 능력 밖의 일이기에 언제나 떠밀려가거나 끌려간다. 해가 뜨고 지는 일처럼 고민 없는 명확함을 원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은 모양이 바뀌는 단단하지 못한 마음은 빗방울이 두드리는 대로 잘게 부서지고, 사라져 가는 마지막 조각을 끝으로 저항은 성공한다. 그렇게 비 오는 날은 이방인이 된다.



'Cause now that they're gone, all I hear are the words that I needed to 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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