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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병지 Sep 13. 2022

방송작가를 그만둔 후 5년이 지났지만

 방송작가를 그만둔 지 5년이 지났다. 고작 4개월을 일했으니 일한 시간의 수 십 배에 달하는 시간이 지난 것이다. 이제는 잊을 법도 한데 가끔 멍하니 있다 보면, 내 정신은 서울 한 대교에서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비추는 데에서 멈춘다. 조연출에게 누락된 서류를 전달하러 가는 길이다. 서울 밤은 까맣고 가로등 불빛은 밝고. 스물넷의 나는 그 가운데에서 걸으며 뭐가 그리 서러운 지 엉엉 울고 있다. 행선지를 알 수 없는 버스가 무섭다. 오는 내일이 무섭다.     


 아침마다 차에 치이는 상상을 했다. 조금만 더 자고 싶었고,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상황이 찾아오길 원했다. 몇 년을 고생해서 방송작가가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내 발로 그만둘 수 없었다. 그렇게 시시한 인간이 될 순 없다. 차마 뛰어들지 못하고 출근하는 길이면 뛰어들 용기조차 없는 나 자신에 또 눈물이 났다.

     

 자고 싶었다. 녹화 전날, 3년 차 언니가 이틀 밤을 새웠다며 옆에서 운다. 뇌가 하얗게 말라 굳은 것 같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조금만 쉬어야지 생각한 순간 잠들었다. 휘청거리며 잠에서 깬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시계를 보니 다행히 몇 분 지나지 않았다. 출연진에게 대본 발부하고, mc 회의실 세팅하고, 커피 사 오고, 의상이랑 메이크업 안내하고, 프롬 화면 연결하고, 오지 않은 출연진 연락 돌리고, 도시락 나눠주고, 마이크 차고, 또 소품 확인하고... 휴대폰 수거하고...또..또..눈앞이 섬멸한다. 선 채로 졸려서 쓰러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넌 여기 왜 왔어?”  나는 이 말이 가장 큰 비수로 남았다. 회식 자리에서 첫 경험을 얘기해 보라고 했을 때나, 너 같은 애가 며느리로 들어오는 건 진짜 싫다 라던가, 넌 대체 하는 게 뭐냐 던가 기타 등등 비수로 남은 많은 말 중에서도 가장 큰 상처가 되는 말. 퇴직의사를 밝힌 다음 날이 출연진 결혼식이었다. 출연진에게 초대받았으니 참석했다. 스텝들은 모두 커다란 테이블에 모여 함께 식사를 했는데, 세컨드 작가가 “너는 여기 왜 왔어?” “어차피 그만 둘 애가 여길 왜 와?” “그냥 오지말지”라고 이야기한다. 메인작가는 말리고 pd님은 머쓱해한다. 스테이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는다.     


 지금 그만두면 아픈 기억으로만 남을 거야 퇴직의사를 밝혔을 때 내 바로 위 작가가 했던 말이다. 이 말이 맞았다. 그 시절이 내겐 뼈아픈 실패로 남았다. 퇴사 후 한동안은 건강을 회복하며 ‘이제 어디서든 잘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정작 잔잔하고 무탈한 일상에 접어드니 당시 기억이 빙산처럼 불쑥불쑥 떠올랐다. 그것도 모나고 상처 난 부분만 골라서. 나는 아직 이 기억을 떨칠 방법을 모르겠다. 그래서 글로 남긴다. 흘려보내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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