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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Apr 12. 2023

콧잔등이 어두워

낯선 곳을 익숙한 곳으로 만드는 것의 의미

 짧게 제주도에 다녀왔다. 지난 연말 휴가에 다녀온 ‘취다선’이 좋아서 한번 더 다녀왔다. 나름 1분기를 바쁘게 보낸 나를 좀 쉬게 하려고 휴가를 내고 혼자 다녀오려 했는데, 4일 중 하루를 지인이 함께 하게 됐다. 내가 지난겨울 다녀온 취다선이 좋았다는 얘기를 몇 번 한 터라 짬을 내서 함께 하게 된 것.


 취다선은 성산에 있는 요가, 명상, 다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작은 방엔 다기가 있어 언제든 원하면 차를 내려 마실 수 있고, 아침저녁으로 요가와 명강 클래스를 하루에 네 개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 하루 한 번은 별도로 마련된 아주 근사한 차실에서 차를 마실 수도 있다. 아침은 연결된 한식집에서 먹는데, 들깨쑥떡국을 비건옵션으로 먹을 수 있다. 취다선에 연결된 타코집은 어딜 내놔도 자랑스러운(?) 곳인데, 타코, 부리또, 퀘사디아, 엔칠라다 등 전 메뉴를 비건으로 먹을 수 있다.

비건 퀘사디아 엄청나다. 토티야칩도 갓 튀겨 엄청나다.

 지난겨울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별 것 안 하고 취다선 안에서만 있어도 하루를 근사하게 보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낮시간 동안 표선에 놀러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냥 방에 돌아가 방해 없이 마음껏 책을 읽어도 좋았다. 이번에는 일정이 3박 4일로 짧기도 했고 핸드폰을 꺼두고 마음껏 책을 읽다 낮잠을 자려고 마음먹고 내려갔다. 월요일에 잠깐 핸드폰을 켰다가 어김없이 일을 하게 되는 몇 시간이 있었는데, 그 이후 다시 핸드폰을 끄고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집중해서 보낼 수 있었다.

방, 명상실, 차실. 너무 좋다.

지인이 함께한 날에는 지인의 렌터카를 타고 가시리 벚꽃 유채길에 갔다. 유채는 키가 크고 벚꽃 나무는 흐드러져서 두 꽃이 만나는 것 같은 길이 10km가 이어진다고, 요가를 가르치러 오신 분의 추천을 따라간 것이다. 정말로 그 두 꽃이 만나는 장관은 아니었지만 하염없이 뻗어있는 꽃길이 예뻤다. 그 길의 끝에 3만 평의 유채밭이 있다는 정보도 들었지만, 결국 우리는 그곳을 찾다가 엉뚱한 공원으로 새서 3만 평의 유채꽃은 보지 못했다.


 지인은 먼저 서울로 가고 나 혼자 남은 날. 3일째 보던 창밖에 노란 유채꽃이 눈에 들어왔다. 유채꽃이 있는 곳 직전까지 해변을 따라 산책을 했는데, 그 바로 옆 바위를 넘어서면 유채밭이 있었던 것. 나는 그 유채밭을 삼일째 되는 날 발견한 것이다. 3만 평은 아니었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잔뜩 피어있는 유채꽃밭은 감탄을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유채꽃 가운데에 서 있으면 유채꽃향이 코로 한가득 들어온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떤 꽃의 향은 화장품을 통해 익숙해지는데, 유채꽃의 향은 찝찌름한 바다 향을 미들노트로 그 위에 산뜻하게 얹히는구나.

 그러고 보니 매일 차를 마시던 차실 뒤에도, 매일 요가와 명상을 하던 공간 뒤에도 유채밭이 있었던가? 길을 건너 건물 뒤편의 밭길을 걸었다. 역시 3만 평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나만의 유채밭이 하나 건너 하나 이어졌다. 털레털레 걸으며 유채향을 맡았다. 익숙한 감각만이 이런 호사를 가져다준다. 늘 새롭고 흥분되는 것들을 찾아 나서는 듯싶지만 그 새로움을 약간은 익숙한 것으로 만들고 나서야 진득한 새로움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제야 '그다음에 어디 가지?', '밥은 어디서 먹지?', '거기까진 어떻게 가지?'같은 생각들을 모두 비우고 내가 있는 곳에 발을 딱 붙이고 서있게 된다.


 "이렇게 콧잔등이 어둡다니!"

 언젠가 누군가 '등잔밑이 어둡다'는 말을 '콧잔등이 어둡다'라고 하고 나서도 그 말을 들은 모두가 '뭔가 이상한데, 뭐가 이상하지..?' 하며 한참 정적을 만들어낸 에피소드 이후 나는 '콧잔등이 어둡다'는 말만 떠올려도 혼자 '푸핫'하고 웃게 된다. 콧잔등이 정말 얼마나 어두운지. 이 어두운 콧잔등 때문에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등에서 본 경험을 따라가느라 바쁘게 되고, 누군가의 추천을 따라 추천해 준 사람의 경험을 하느라 바빠진다. 매번 갔던 여행지를 또 가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도 분명해진다. 두 번째, 세 번째 가면 보이는 것들이 달라지니까.

제주도 갈 때마다 자주 먹는 유기농 당근주스, 팥죽, 호떡

 2년 전 미술치료수업을 우연히 참여한 적이 있다. 흙으로 작품을 만들며 내 무의식에 있는 것들을 꺼내 보는 일이었다. 선생님의 가이드에 따라 이렇게 만지고 저렇게 만지고 나면 분명 같은 가이드지만 참여자가 만든 작품은 천차만별이 된다. 내 완성품을 보고 선생님은 '저 멀리 추진력 있게 날아갈 준비가 다 되었는데, 엉덩이는 땅에 딱 붙이고 있고 싶어 한다'라고 했다. '안정감과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나'를 표현하게 된 것이라고. 그때는 그 얘기를 듣고 두려움에 압도되어 어디론가 새로움을 향해 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일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시간이 지나 박스에 들어있는 그 흙작업 결과물을 꺼내보면서, 한남동 거리를 걷다 본 'I am rooted, but I flow'를 또 떠올리면서, '엉덩이를 딱 붙이고 싶어 하는 나'를 더 보게 된다. 새로운 것을 더 많이 보고 경험하겠다고, 아니 더 많이 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나'보다 엉덩이를 더 붙이고 뿌리를 내리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뿌리를 깊이깊이 내려야 더 자유롭게 멀리멀리 갈 것이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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