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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May 22. 2021

하루 종일 개 꽁무니만 쫓아다녔다.

이태리 덕후의 시골 산책 3. Umbria - Pettino

전 직장 후배 중 이탈리아 페루쟈(Perugia)라는 도시에서 유학을 하고 온 친구가 있었다. '나는 이탈리아 남부를 더 좋아한다'는 일종의 선입견을 스스로 만들고 있던 터라 페루쟈가 있는 움브리아(Umbria) 지역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었는데, 그 친구 덕분에 움브리아 지역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다. 페루쟈는 유명한 대학교가 있어 전 세계에서 유학을 온 젊은이들이 많은 도시인 동시에, 유럽 최대 재즈 페스티벌이라고 알려진 '움브리아 재즈 페스티벌'이 매년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페루쟈를 중심으로 약 한 달에 걸쳐 열리는 이 페스티벌은 내가 다음 휴가지역으로 움브리아를 선택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로마에서 두 시간쯤 차나 기차로 이동하면 페루쟈에 도착할 수 있다. 나는 우선 재즈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페루쟈 숙소를 예약해두고, 주변에 볼거리들은 더 없는지 검색했다. 검색 결과에 트러플이 나타났다. 움브리아는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트러플 산지라고 한다. 한국에서 나는 아주 특별한 날 식당에서 생 트러플을 갈아 얹어주는 파스타를 한 번 먹어본 적이 있었다. 버섯이라는 명칭에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와 독특한 향 덕분에 파스타를 먹는 내내 생소함을 떨칠 수 없었지만, 집에 돌아온 뒤 한참 생각나던 맛이었다. 움브리아 곳곳에는 관광객을 위해 트러플을 직접 채취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들이 있었다. 늘 깊게 고민을 안 하는 편인 나는 그중에서 가장 음식을 맛있게 내어줄 것 같은 곳으로 골랐다. 심지어 그 음식을 함께 만들어 본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The black truffle lodge>는 페루쟈에서도 40분 정도 떨어진 Pettino라는 작은 시골마을에 있는 멋진 공간이었다. 롯지라기엔 많이 럭셔리했던, 특히 가격 면에서 당시 내가 지불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곳이어서 숙박은 포기했지만, 점심식사와 트러플 헌팅을 포함하는 프로그램만 참여하는 것도 가능했다.


움브리아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사촌언니가 여행에 따라오겠다고 했다. 언니는 살면서 한 번도 배낭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20대엔 치열하고 바쁘게 살았고 이제 애들이 조금 커서 한 숨 돌리며 생각해보니 아이들 없는 여행은 앞으로 한참 불가능할 것 같아 이참에 따라나서겠다고 했다. 언니는 차를 렌트하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뚜벅이고 어디든 차 없이 여행하는데 불편함을 못 느꼈던 나는 언니를 말렸다. 이탈리아에서 운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언니는 아주 어릴 때부터 운전을 해왔기 때문에 차 없이 어디를 간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워했다. 결국 언니가 빌린 차로 로마에서 롯지를 찾아 가려했지만, 온통 비포장 도로에 도로표지판 하나 없던 그 시골에서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롯지에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 영어 발음이 강한 남자가 전화를 받고 우리를 데리러 왔다. 낯선 타지에서, 그것도 운전을 험하게 하는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서 고속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이어달리다 보니 우리 둘 다 예민해지고 말았다. 둘 다 말은 안 했지만 그 영국 남자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파고들었다. 언니는 목적지의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한 나에게, 나는 구태여 차를 렌트한 언니에게 피곤함의 탓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데리러 나온 그 영국 남자는 이탈리아 여자 프란체스카를 만나 이 곳에 정착해 The black truffle lodge를 만든 사장님이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족들은 모두 아주 옛날부터 이 곳에서 트러플 헌팅과 낙농업 등으로 생계를 꾸리는 농부 가족이었는데, 프란체스카가 영국 남자와 결혼하면서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로 가업이 확장된 셈이다. 3살짜리 꼬마가 낯을 가리지 않고 우리를 반겨줬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집 안으로 안내를 받고, 프란체스카가 모카포트로 내린 커피를 마셨다.


프란체스카의 삼촌은 이 가문에서 트러플을 채취해서 판매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가 키우는 개 두 마리가 트러플 헌터들이다. 트러플은 개나 돼지 같은 동물들이 예민한 후각을 이용해 채취한다. 신통방통한 개들이 땅속에 파묻혀있는 트러플을 발견하면 트러플 향이 가미된 간식을 개들에게 먹여주고 그들이 찾은 트러플과 맞바꾸기를 한다. 개도 트러플이 좋아서 찾은 건데, 향만 조금 가미된 과자를 주고 뺏어오려니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우리는 삼촌과 개들을 따라 한참이나 산길을 걸었다. 가벼운 산책 정도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산기슭을 한참이나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해야 하는 데다 개가 뛰면 우리도 함께 뛰어야 했다. 개도 우리도 숨을 헐떡였다.


한참 개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다 보니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미리 정상에 도착해있던 프란체스카의 남편은 잠시 우리에게 움브리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스푸만테를 권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의 전경은 나무가 별로 없어 어쩐지 우리나라의 산세보다 좀 허술해 보였지만, 양 떼가 가득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나름 이국적인 매력이 있었다. 양 떼도 프란체스카의 가족이 기르는 것이라고, 저렇게 풀어두면 양치기 개가 저 많은 양들을 돌본다고 한다. 땀을 식히며 스푸만테를 한 모금하고 있으니, 어디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삼촌이 브루스타를 꺼내 계란으로 스크램블을 만들고 있었다. 작은 접시에 나눠 담은 스크램블 위에 직접 만든 파르미지아노 치즈와 오늘 채취한 트러플을 아낌없이 갈아 올렸다. 치즈와 트러플이 함박눈처럼 쌓였다. 와...! 산 정상에 돗자리도 없이 털썩 주저앉아 먹는 트러플 스크램블과 스푸만테라니! 내 인생 이런 호사가 또 있을까? 지금 막 채취한 트러플은 풍미가 대단했다. 트러플 오일이나 페이스트로 먹을 때의 찝찝한 쩐내 같은 것 날 때가 있었는데, 신선한 트러플은 오묘하고 매력적인 풍미만 있을 뿐이었다. 삼촌은 연신 여름 트러플은 맛이 덜하다며, 나중에 화이트 트러플이 나오는 겨울에 한 번 더 오라고 했다.


우리가 그 날 채취한 트러플. 큰 것은 못찾았지만 충분했다. 호사스러운 스크램블에그와 함께 짠.
양도 개가 지키고 트러플도 개가 찾아오는 신기한 동네. 영특한 개들이 사람 몫을 했다.
이렇게 아낌없이 트러플을 갈아 올릴 날이 내 생에 다시 올까. 다시 온다면, 화이트 트러플이었으면 더 좋겠다.

그렇게 피크닉을 마치고 우리는 롯지로 돌아왔다. 프란체스카가 치즈와 샤퀴테리를 만들어 저장해둔 공간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직접 만든 페코리노, 파르미쟈노를 포함한 치즈와 살시챠, 관찰레, 프로슈토 같은 샤퀴테리들이 쿰쿰한 냄새를 풍기며 숙성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아직까지 직접 된장과 김치를 담그는 것처럼 이들은 치즈와 햄을 만들었다. 엄마는 된장을 거르고 나면 늘 '이쁜 내 새끼'라며 어린아이를 달래듯 된장을 담아 둔 통들을 쓰다듬는다. 혼자 살고 나서 내 입에 들어가는 먹을거리를 처음부터 만드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되면서 나는 그 '이쁜 내 새끼'의 뜻을 어렴풋하게 이해하게 됐다. 치즈와 햄, 트러플 소스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프란체스카는 이보다 예쁜 애들이 없다고 연신 자랑했다. 먹을거리를 잔뜩 만들어 저장해 두고 어린 아이 예뻐하듯 하는 것이 어딜 가나 관통하는 정서라는 점에 나는 웃음이 났다. 우리는 즉석에서 썰어주는 고기들과 치즈들, 그리고 트러플 페이스트와 잼 등을 곁들여 스푸만테를 마셨다. 아주 큰 트러플을 찾진 못했지만 오늘 점심식사로 충분히 먹을 수 있다며 프란체스카가 분주해졌다. 그녀는 밀가루에 계란을 섞어 파스타 도우를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도와 파스타 반죽을 밀었다. 숙성시켜 얇게 민 반죽을 굵게 썰어 딸리아뗄레를 완성했다. 완성한 파스타면은 짧게 익힌 뒤, 버터와 트러플로만 가볍게 소스를 입혔다. 살시챠와 토끼고기를 토마토소스에 오래 끓여 고기 요리도 완성했다.

내가 먹을 것을 내가 만든 다는 것은 언제나 멋진 일이다. 나도 언젠가 김치는 직접 담그면서도 밥상을 차려낼 때는 숟가록 하나로 슥슥 모든 요리를 쉽게 해내고싶다.  

점심 식사가 다 준비되고 우리는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았다. 이미 나른한 오후였지만, 와인과 식사가 더해지니 한층 더 나른해졌다. 파스타와 고기 요리, 그리고 크림으로 만든 디저트로 간단히 점심식사를 했다.  롯지 외에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던지라 그릇에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와인 잔이 챙-하고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우리가 나누는 대화 말고 들리는 것은 새소리뿐이었다. 찾아오는 길의 고단함 때문에 예민했던 언니와 나는 내내 별 다른 대화가 없었다. 트러플 헌팅을 하는 내내 서로의 사진은 충실히 찍어줬지만 이전처럼 재잘대지는 않았다.

"너무 좋다."

"너무 좋지 언니."

"오길 잘했네."

"그지. 힘들었는데 그래도 오길 잘했지."

"응. 오길 잘했다. 잘 찾았네."

정적을 깬 경상도 출신 두 여자의 대화는 나도 모르게 자꾸  채워지는 와인잔에 함께 녹아들었다. 내가 먼저 더 살갑게 굴었으면 Pettino에서의 추억이 좀 더 아름답게 기억됐을까? 우리 둘 모두 초행길이었던 그 길을 애써 찾으려 말고 미리 우리를 데리러 나와 안내해달라고 할 걸 그랬나? 혹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근력이나 비타민을 포함한 각종 영양제는 아니었을까?


식사 후 숙소를 둘러봤다. 지내는 공간도 너무 멋있었지만, 별도로 지어놓은 스파가 인상적이었다. 화강암처럼 생긴 검은 돌로 만든 욕조가 2층 침대처럼 놓여있고 주변에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 작지만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독특한 스파였다. 프란체스카는 이 곳에 머무는 투숙객에게는 직접 만든 삼시 세 끼와 스파, 트러플 헌팅 프로그램과 커피, 다과, 와인과 샤퀴 테리, 그리고 픽업 서비스가 모두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픽업 서비스. 우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우리에게 부족했던 건 여행 경비였구나! 더 열심히 벌어서 멋지게 풀 패키지로 한번 더 머물러 보기로, 그때는 화이트 트러플 시즌이길 바라본다.


프란체스카와 함께 만든 트러플파스타와 토끼고기, 소세지 요리. 만드는 과정도 간단했지만, 맛은 간단치가 않았다.


사실 길거리 공연은 전체 행사의 백 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큰 무대를 도시 곳곳에 지어두고 동시 다발적으로 공연이 이어진다. 꼭 한번 다시 갈, 움브리아 재즈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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