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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May 19. 2021

조용한 시골을 완전히 바꾼 그 여자

이태리 덕후의시골 산책2 - 사르데냐 Gergei의 특별한 공간

워낙 바다를 좋아하다 보니 내가 선택하는 여행지는 주로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이거나 섬이다. 지난 2019년 2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며 나는 한 번도 가지 않은 섬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처럼 큰 섬인 시칠리아가 있고, 그다음으로 큰 섬인 사르데냐를 포함해 여러 작은 섬들이 있다. 나는 언젠가 이 작은 섬들에서 모두 벌거벗고 수영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시칠리아는 다녀온 적이 있으니 사르데냐로 가기로 했다. 프랑스나 영국에서 휴가를 보내러 오는 휴양지의 이미지, 몰디브 바다색처럼 옥색 바다가 펼쳐지는 곳이라는, 그저 내가 풍덩 빠져 수영하기에 좋은 바다라는 정보만 가지고 나는 바리에서 사르데냐 주도인 깔리아리로 가는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바다를 낀 여행지만큼 좋아하는 것은 시골 여행지의 독특한 숙소다. 그중에서도 가정식 요리를 직접 내어주고, 그 요리를 가르쳐주는 곳이면 금상첨화다. 직접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고 있으면 고민하지 않고 바로 예약한다. 나는 사르데냐 깔리아리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떨어진 'Gergei'에서 이런 곳을 발견했다. <Domu antiga>. 오래된 집이라는 뜻이란다.  

사르데냐는 휴양지이지만 본토에 비해 매우 한적하고 깨끗하며, 물가도 싸다. 사르데냐 동쪽이 가장 유명한 해변들이 모여있다.


깔리아리에서 버스를 타고 Gergei에 내렸다. 아무리 검색해도 Gergei에 특별한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Domu Antiga>라는 B&B 겸 쿠킹스쿨에서 이틀을 머무는 것으로 충분하다 싶었다. 버스에서 내려 짐을 끌고 찾아간 Gergei는 예상대로 몹시 조용했고, 숙소를 찾아가는 동안 그 흔한 에스프레소 바 하나 보지 못할 정도로 시골이었다. 닭이 우는 소리, 개가 짖는, 어디선가 종이 울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지만, 웅성웅성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Domu antiga에 들어서니 호스트인 줄리아가 나를 반겨줬다. 줄리아는 유창한 영어로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를 소개해줬다. 가족 모두가 이 숙소를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방은 3개가 있었고, 모두 게스트들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의대생 커플과 LA에서 신혼여행으로 사르데냐에 온 커플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 날 오후 쿠킹클래스에 참여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먹기로 했다. 


쿠킹클래스에서는 5가지 종류의 파스타와 토끼고기 요리, 사이드로 내놓을 채소 요리들, 그리고 디저트까지 배웠다. 줄리아와 그녀의 어머니는 따뜻하고 차분하게 사르데냐 전통 음식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이탈리아 음식을 좋아해서 많이 먹어 봤다고 생각했는데, 사르데냐 음식은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역사적으로 여러 국가의 영향을 받았던 터라, 세몰라 밀가루와 올리브 오일, 토마토를 쓰는 것은 같았지만 이탈리아 본토의 음식과는 아주 많이 다른, 생소하면서도 매력적인 음식들이었다. 


속을 채운 라비올리와 비슷한 파스타도 있었는데, 치즈와 버섯으로 속을 채운 뒤 옆을 단단히 꼬집어 여민 다음 튀기거나 오븐에 구워 먹는 식이었다. 만두와 비슷하게 생긴 쿨루르죠네스 파스타는 속을 치즈와 감자, 허브로 채운 뒤 단단하게 꼬집어 여며 만든다. 물에 데쳐 익힌 다음 토마토소스를 가볍게 입혀 먹었다.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페코리노 치즈의 90% 이상이 사르데냐에서 생산되는 만큼 페코리노 치즈를 많이 이용했지만, 염소젖으로 만든 생치즈나 단기간 숙성시킨 치즈도 사용했다. 파스타 도우를 아주 얇게 밀어 염소젖 치즈와 레몬 제스트로 속을 채운 뒤 튀겨내 꿀을 뿌려먹는 사르데냐 전통 디저트도 예상이 가능한 맛이었지만 또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나를 포함한 숙소의 게스트들은 열심히 만든 요리들로 저녁상을 차렸다. 지역에서 생산한 와인을 내어 주시기에 한 병, 다른 게스트들이 사 온 와인들도 모두 오픈해서 마셨다. 그 날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고 나만 커플들 사이에 혼자 껴 있었지만, 더없이 즐거운 밤이었다. 지나왔던 여행, 앞으로의 여행들에 대해서, 그리고 각자가 살면서 경험하는 어려움들과 이를 순탄하게 극복하게 해 준 것들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중요한 것들은 다 놓쳐버리고 일만 하다 죽지 않아야겠다 다시 다짐했다. 

우리가 만든 파스타들. 아주 예쁘게 빚어진 것들은 줄리아나 그녀의 어머니가 만든 것일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다른 게스트들은 모두 정해진 다른 여행지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이메일을 교환하고, 서로의 인생이 행복하고 무탈하길 빌어줬다.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친 지난해, 나는 이때 배운 쿨루르죠네스 파스타를 집에서 만들어봤다. 줄리아에게 배울 때 모양을 너무 못 잡아서 못생긴 만두들만 잔뜩 만들었었는데 집에서 다시 차분히 만들어보니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Domu antiga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내고 안부를 물었다. 다들 안전하고 건강하게 지낸다고 했다. 2020년엔 이런 것들을 하겠노라 서로 나눴던 계획들은 미뤄지거나 취소됐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는 건강하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혼자 숙소에 남은 나는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치즈를 만들려면 염소젖이 필요했고, 우리는 같이 염소젖을 짜러 나섰다. 아주 작은 규모의 염소 농장에는 40마리 정도의 염소들이 있었다. 처음 젖을 짜보는 터라 잔뜩 긴장을 한 나와 달리 줄리아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염소들을 어르고 젖을 짰다. 줄리아도 염소를 기르고 있는데, 몇 마리 되지도 않고 젖을 상시적으로 짤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줄리아는 처음 Domu antiga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나서, 어느 집을 사서 개조할지 보러 다니다 발견한 이 염소농장에 무작정 들어가 아기 염소 두 마리를 달라고 했단다. 주인은 당황했지만 줄리아는 단호했다. 가진 돈이 얼마 없으니 이 돈을 받고 나에게 아기 염소 두 마리를 주면 잘 키워보겠다고 했단다. 그렇게 받아온 염소들은 줄리아의 농장에서 풀을 뜯고 자라고 있다. 


몇 가지 치즈를 직접 만들어봤다. 막 짜 온 염소젖에 렉틴을 넣어 단백질을 응고시키고 이를 걸러 굳혔다. 남은 유청은 여전히 단백질과 지방이 풍부해 한 번 더 가열한 뒤 거른다. 이게 바로 리코타치즈다. 다시 가열한, re-cook의 의미가 포함돼 있다. 내가 만든 치즈는 줄리아 어머니가 직접 만드신 콤포트와 잼, 그리고 지역 농부가 채취한 꿀과 함께 맛봤다. 고소하고 신선한 풍미가 달콤한 맛에 어우러졌다. 


젖을 짜서 돌아오는 길에 어쩌다 이런 시골에 Domu antiga를 만들게 됐냐고 줄리아에게 물었다. 줄리아의 가족은 대대로 이 곳에서 태어나 자라 농사를 짓는 농부 집안이었다. 동물과 농사, 요리를 좋아하는 줄리아는 Gergei가 좋기도 했지만, 평생 이 작은 마을에만 갇혀있는 기분이라 답답하기도 했단다. 그녀는 무작정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이탈리아에서 왔으니 커피집에서라도 취직을 하겠지 싶어 밟은 호주 땅에서 그녀는 호주의 커피 문화에 매료됐다고 한다. 이탈리아와 완전히 다른 호주의 세련되고 체계 잡힌 커피 문화를 통해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바리스타를 평생 업으로 삼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호주에서 가장 큰 섬인 태즈메이니아로 향했다. 그곳에는 꽤 큰 규모의 유기농 농장을 운영하면서 쿠킹스쿨과 숙박시설을 함께 운영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 1년을 지내며 줄리아는 앞으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그려나갔다. 


Domu antiga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난 뒤, 그녀는 근처에 다른 숙소를 하나 더 만들었다. 신혼여행객이나 커플만을 위한 프라이빗한 곳인데, 이 곳을 줄리아가 사기 전까지 시인이 살 던 곳이었다고 한다. 시인이 죽고 난 뒤 남긴 여러 작품들과 메모들을 활용해 실내를 장식한, 둘 도 없는 로맨틱한 공간이었다. 아침과 저녁 식사도 줄리아 모녀가 만들어 직접 숙소로 배달해주기 때문에 충분히 둘 만 휴식할 수 있는 곳이다. 이밖에도 줄리아는 양봉을 배워 벌이 가장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환경에서 꿀을 채취하는 법을 배우고 있으며, 콩과 밀과 같은 곡식들과 양, 염소를 치는 농장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사르데냐 지방정부와의 협력으로 Gergei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발견해내고 이를 관광 상품화하는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아무것도 없던 조용한 시골마을에 숨이 불어넣어지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데는 줄리아의 공이 제일 컸다. 이 모든 일을 줄리아가 앞서서 벌이면 가족들이 도와주는 시스템이었다. 줄리아는 나에게 이 얘기를 해주는 와중에도 Gergei에 노는 땅을 봐 둔 것이 있다며, 그곳에 어떤 재미있는 공간을 지을지 브레인스토밍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염소젖을 짜러 가자고 했을 때 나는 이렇게 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막 만든 치즈와 콤포트, 잼. 염소젖 리코타치즈는 내가 알던 소 젖의 것과 또 다른 맛이었다.


이 많은 일들을 이뤄낸 것이 고작 5년 남짓. 어디서 이런 일을 다 해낼 에너지를 얻냐는 내 질문에 그녀는 태즈메이니아에서의 1년을 꼽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며 이대로 내 삶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싶을 때 영감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 나에게 찾아온 것을 놓지지 않을 힘을 기르고만 있으면 된다고. 삶이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을 정도의 좌절이었는지는 아직 다 살아보지 못해 얘기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 다시없길 바라는 좌절을 올해 겪으면서 줄리아를 떠올렸다. 이 터널이 끝나고 찾아오는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으려면 어떤 힘을 어떻게 힘을 길러야 할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과, 내가 너무 흘러가는 대로 안주하고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메트로놈의 바늘처럼 왔다 갔다 겹쳐 든다. Gergei는 집값이 매우 싸니 (그만큼 편의시설과 인프라도 하나도 없지만) 긴 휴식이 필요하면 언제든 오라고 하던 그 약속만 기억하고 사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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