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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07. 2021

처음 본 낯선 여자의 집에 따라갔다.

이태리 덕후의 시골 산책 5. - 아말피가 비싸서 간 살레르노

2008년 큰 마음을 먹고 4개월간 유럽과 아프리카를 여행할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았다. 나는 친구가 챙겨준 '론리플래닛' 이탈리아와 스페인 편만 따로 찢어 배낭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여행을 떠났다. 여행기간이 길기도 했고,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을 워낙 싫어해 고등학교 때 쓰던 책가방에 속옷과 수영복, 긴팔 옷 한 벌과 짧은 팔 한 벌을 챙겨 간소하게 떠난 여행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용돈을 모아 떠난 장기여행인지라 나는 그야말로 돈 없는 대학생 여행자였다.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도 팔뚝만 한 2유로짜리 케밥으로 점심과 저녁을 동시에 해결해야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병원비를 크게 쓰고 난 뒤에는 하룻밤에 2유로짜리 캠핑사이트에서 머물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아말피 해변은 그림의 떡이었다. 특히 포지타노에는 당시 호스텔이 딱 하나 있었는데, 그마저도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비쌌다. 이탈리아 남부 중에 아말피해안을 제일 가보고 싶었는데, 숙소도 음식도 어느 하나 만만한 비용이 없었다. 그러다 론리플래닛을 다시 꼼꼼히 보니 아말피에서 버스로 한 시간쯤 거리에 살레르노라는 도시가 있고,  거기에 저렴한 유스호스텔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관광지가 아니라 숙소는 여유 있었다. 버스로 한 시간이야 서울 끝에서 끝도 못 가는 거리니 문제 되지 않았다.


살레르노 자체는 정말 볼거리가 없는, 그야말로 산업화된 항구도시였다. 흡사 포항 같은 분위기였다. 해변을 끼고 있었지만 아말피처럼 아기자기하지 않았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컨테이너 선박들만 가득했다. 나는 살레르노에서 총 6박을 하며 아침 일찍 SITA 버스를 타고 포지타노, 아말피, 라벨로, 콩카데마리니, 푸로레 등 마을 하나를 정해두고 다녀왔다. 아말피나 포지타노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푸로레와 콩카데마리니 같은 마을도 매력이 넘쳤다. 해변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모래 위에 아무렇게나 누워 책을 읽었다. 더위가 몰려오면 바다로 들어가 헤엄을 쳤다. 하루 종일 놀다가 돌아온 살레르노에는 동양인이라고는 나와 이태리어 학원을 다니는 일본인 여자아이 한 명이 전부였다. 버스표를 사러가도, 밥을 먹으러 가도 모두의 집중을 받았다.






Furore. 이 다리에서 매년 다이빙대회가 열린다. 다리를 마주보고 작은 해안이 있고, 그 옆에 귀여운 레스토랑이 하나 있다.
Conca dei marini로 내려가는 길.


그중에서도 나를 특히 기특하게 여기는 식당 주인이 있었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라는 다소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영국 분위기를 내는, 그러나 전통적인 이탈리아 음식과 술을 파는 곳이었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주인은 영어를 잘해서 나에게 여행 팁을 주기도 하고, 젤라토 가게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나는 음식 맛도 좋고 동네에 영어로 묻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편해 그곳에서 이틀 연속 저녁을 먹었다. 다시 본 얼굴이 반가웠는지 이틀째 되던 날 그 주인 - 마우로-는 나에게 사람들을 소개해주기 시작했다.


처음 소개해준 사람은 그 지역에서 쿠킹클래스를 할 수 있는 요리사였다. 내가 이태리 요리를 배우고 싶다고 했더니, 친구 중에 요리사가 있는데 지금은 요리 일을 하지 않고 카약 렌트 숍을 한다고 했다. 그 친구에게 얘기해 오전에 카약을 타고 오후에 요리를 배울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아주 저렴한 비용에 하루 코스를 즐길 수 있었다. 아말피 해안 중에 파도가 잔잔한 곳을 골라 카약을 타고, 오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기본적인 토마토소스와 파스타 두 가지를 만들어 먹었다. 나는 이 쿠킹클래스 이후로 어디든 여행가면 지역의 음식을 배우는 쿠킹클래스를 듣는 여행을 하게 됐다.


두 번째로 소개해준 사람들은 마우로의 동네 친구들이었다. 한 6명 정도 되는 친구 그룹이었는데, 자주 마우로의 가게에서 저녁을 함께 먹기도 했다. 내가 살레르노에 머문 셋째 날 그 친구 그룹이 저녁을 먹는 자리가 있었고 나는 그 무리에 끼어 음식과 술을 함께 먹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그중 두 명은 영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 다음날 언더그라운드를 가면 또 그 무리 중에 몇 명이 식사를 하고 있는 식이었고, 자연스럽게 나는 그들과 매일 저녁을 함께 먹게 됐다. 친절한 사람들은 한 번도 내가 내 몫의 식사비를 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고, 미안했던 나는 젤라토를 사서 함께 나눠 먹었다.


그렇게 살레르노에서의 일주일이 지나고 나는 그리스로 떠났다. 아테네와 크레타, 산토리니, 파로스, 안티파로스, 낙소스, 미코노스까지 여행하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총 4개월의 여정 중 일주일이 남았고, 나는 아테네와 근교를 여행하다 로마로 돌아가 한국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사고가 터졌다. 아테네에서 나는 엄청난 생리통에 시달렸다. 가지고 간 진통제도 없어 같은 방에 묵던 영국 여자아이에게 약을 빌려 먹었지만 약효가 오래가지 않았다. 거의 4개월 동안 별 일없이 잘 지냈는데, 나쁜 일은 꼭 한 번에 몰려오는 것인지 그 숙소에는 바퀴벌레가 자주 출몰했고, 숙소 앞의 광장에는 하루에 한 명이상이 약물 과다복용이나 살인으로 죽어나가고 있었다. 그리스 섬들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스산하고 엽기적인 일들을 한꺼번에 겪다 보니 나는 남은 일주일을 그냥 이탈리아에 가서 보내고 싶었다. 어디가 됐든 일단 좋은 기억만 있었던 이태리로 가면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배를 타고 이태리로 이동하기 위해 항구로 향하려는데 생리통이 점점 심해졌다. 여행 중 처음으로 택시를 탔다. 택시 아저씨는 지갑과 여권이 든 내 가방을 벗기더니 나를 강제로 앞좌석에 태웠다. 애매하게 부적절한 터치가 이어졌다. 나는 빨간 신호에 걸린 틈을 타 배낭을 가지고 차에서 내렸다. 신호등 옆에 경찰차가 있어서 용기를 냈다.


별 이상하고 위험한 일을 다 겪다 보니 녹초가 됐다. 아직도 생리통으로 괴로웠다. 나는 평소라면 타지 않았을 2인실 침대석으로 배를 예약했다. 배 시간은 4시간쯤 남았지만 주변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정박해있는 배에 일찌감치 타 침대를 찾고 누웠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바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리스어가 아닌 이태리 말이라는 것은 알아들었다. 눈을 뜨니 세네 살쯤 된 남자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여성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우리 침댄데 잘못 누운 것 같아."

"아... 미안합니다. 제가 몸이 아파서 정신이 없었나 봐요. 제가 2층인가 봐요."

"아 이미 누웠으니 그냥 여기서 쉬어요. 우리가 2층 올라가면 되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여성은 자신을 비앙카라고 소개했다. 아들과 함께 그리스에 다녔다 집으로 가는 길이라고.

"근데 어디가 아파요?"

"아 생리통이요."

"아, 진통제 줄까요?"

애드빌을 건네받았다. 에메랄드색 그 약이 마치 생명수같이 느껴졌다.

"그리스에 놀러 다녀오세요?"

"아니, 애기 아빠가 그리스 사람이에요. 어릴 때 그리스 놀러 갔다가 눈이 맞아서 얘를 임신했는데, 글쎄 책임을 못 지겠다고, 나 혼자 키우라잖아. 그거 알아요? 나는 그리스 남자 너무 싫어해."

"저도요. 저 배 타기 직전에 그리스 택시 아저씨가 저한테 몹쓸 짓 했어요."

"맘마미아.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괜찮아요. 그냥 안전벨트를 왜 어깨랑 허벅지를 만지면서 차 줘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다행히 도망쳤으니 망정이지."

"그랬구나. 근데 이태리 어디로 가요?"

"저요?..."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에겐 목적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태리로 가야지 싶어 아테네에서 바리로 가는 배를 탔을 뿐이었다. 갈 곳이 없으면 로마에 가서 일주일을 머물다 출국할 생각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든 좋아요 이태리는."

"우리 집으로 가요. 집에 방 많아."

"집이 어디세요?"

"살레르노."

세상에. 그 넓은 이태리 땅 중에서도 살레르노에 사는 사람이었다니.

"오 마이 갓. 저 살레르노에 일주일 있다 왔어요. 언더그라운드 아세요? 저 맨날 거기서 저녁 먹었는데."

"맘마미아!! 말도 안 돼. 거기 마우로가 하는 집이잖아요. 막시모도 맨날 거기서 저녁 먹고! 걔네 다 제 초등학교 동창들이에요. 저도 자주 거기 가서 밥 먹어요!"

세상이 이렇게 체리만 하다. 갈 곳도, 돈도 없었던 나는 아는 사람도 있는 살레르노로 돌아가 비앙카네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다. 세상 어디 이런 프로민폐녀가 있나 싶었지만, 별다르게 대안도 없었다.


비앙카는 살레르노에서도 야경이 아주 아름다운 곳에 있는 아파트 꼭대기층에 살고 있었다. 부모님과 비앙카, 그리고 어린 아들 넷이 사는 집에는 정말 빈 방이 여러 개 더 있었다. 의사소통이 어려웠지만 비앙카의 부모님은 비앙카가 출근한 동안 나를 위해 아침을 차려주기도 하고 불편한 게 없는지 계속 살펴주셨다. 비앙카는 퇴근하면 나를 데리고 언더그라운드에 데려가 저녁을 먹이기도 하고, 다른 피자집에 데려가 비앙카의 친구들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루는 비앙카가 휴가를 내고 부모님과 아들, 나를 데리고 아말피 해안으로 가서 함께 피크닉을 즐기기도 했다. 또 어느날은 마을에 축제가 있어 다 함께 그 축제를 즐기기도 했다.


다시 돌아간 나를 '언더그라운드 패밀리'들은 지나치게 반겨줬다. 그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그중에서도 저녁시간만을 같이 보냈기에, 그래서 여행자인 나에게는 그들이 고맙고 특별한 존재일지 몰라도 손님을 대하는 그들에게 나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 중 하나이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들은 내 걱정이 무색하게 나를 반겼다. 식당 주인인 마우로도, 그중에서 나에게 특히 친절했던 막시모와 죠반나도 다시 돌아온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구경시켜주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사 먹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왔데요. 그 먼 데서 여기까지. 아말피가 비싸서 여기서 지낸데요."

죠반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소개해주느라 바빴다. 동네 사람들은 쑥스러워하는 나에게 볼 키스를 해주며 이 먼 곳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돈을 먼저 벌어야 해서 학업을 포기했던 죠반나에게 대학교를 다니면서 책 한 권 달랑 들고 이 먼 곳까지 혼자 온 내가 대단해 보였다고 한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총기가 보인다고, '미스 인텔리전트'라고 나를 동네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했다.


막시모는 나를 특별히 더 애틋하게 여겼다. 비앙카와 초등학교 동창이자 비앙카의 단골 피자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막시모는, 내가 출국을 하기 위해 로마로 떠나기 전날 피자집 문을 닫았다. 로마로 가기 이틀 전 밤, 막시모는 하루쯤 장사를 접어도 된다며, 아침 9시까지 항구로 나오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아침에 살레르노 항구로 갔더니 막시모는 세상 더없이 해맑게 웃으며 요트 위에 서 있었다.

"솔라레! 여기야!!"

막시모는 나를 솔라레(태양)라 불렀다.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이던 스물두 살의 여행자인 나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차오!'하고 인사를 했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 것 같아서 따라한 것뿐이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밝고 경쾌해 마치 태양빛 같았다고 한다. 지금은 어디 가서 부끄러워 꺼낼 수도 없는 얘기가 된 것 같다. 내 태양빛은 바래버린 걸까 싶다. 어쨌든 막시모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아말피 해안을 보여주고 싶어서 식당 문을 닫고 요트를 빌렸다. 새우를 튀기고, 샌드위치도 싸고, 맥주와 물을 챙겨 온 막시모와 나는 요트를 타고 아말피 해안을 돌아봤다.

"아말피에서 바다를 보는 것보다, 바다에서 아말피를 보는 게 훨씬 예쁘지."

"진짜네. 진짜 예쁜 건 바다에서 포지타노를 보는 거였구나."

좁은 계단이 꼬불꼬불 이어지는 아말피 해안의 마을들은 너무 아름답지만 사람이 많아 복잡하고,  그 많은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만만치 않았다. 바다에서 바라본 마을들은 그런 면모들은 온데간데 없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햇살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막시모는 요트를 멈추더니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수영을 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깊은 바다에서 구명조끼 하나 없이 해본 적은 없었다.

"솔라레! 너도 들어와 봐. 진짜 따뜻해. 요트에 구명튜브 있으니 내가 그걸 줄게."

한참을 망설이다 나도 뛰어들었다. 여기서 사고가 나서 후회하는 것과 이 바다에 뛰어들지 않아 후회하는 쪽 중에 나는 후자가 더 크다고 생각했다. 손 발을 열심히 젓다 이내 냅다 누워버렸다. 부력에 의해 둥둥 뜬 나와 막시모는 태양빛을 그대로 받으며 한참을 아말피 바다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자유롭다'는 말의 의미를 나는 그때 알았다. 내 몸을 스치는 미지근한 바닷물과 태양빛 말고 내 오감에 느껴지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그 바다에서 그렇게 한참을 놀다 돌아왔다.  


내가 이태리 소도시의 매력을 처음으로 알게 해 준 곳, 따뜻한 사람들이 있는 곳 살레르노였다.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아마 매일 왕복 두 시간이 넘는 버스길 - 그것도 1차로의 아슬아슬한 곡선길에 올라선 모든 차가 클랙션을 동시에 울려대는 그 길-을 매일같이 다닐 자신이 없다. 그때의 나는 어렸고, 돈이 없었으며 한 줌 체력밖에 가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친절한 사람들을 잘 만나면 그들을 곧 잘 믿었다.  아마 그 옛날에도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고, 운이 좋아서 그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하루라도 묻지마 범죄 소식이 뉴스를 도배하지 않는 날이 드문 요즘, 나는 다시는 그런 여행을 못해볼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 옛날 여행 이야기가 애틋하다. 내 친구나 후배, 조카가 지금 여행 가서 그렇게 낯선 이들을 아무 경계 없이 따른다고 하면 도시락을 싸들고 말릴지도 모른다. 인류애가 매일매일 사그라드는 요즘 그때 만났던 그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 그냥 여행 온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던 나를 기특하게 여기고 과하게 친절을 베풀어준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 누구도 믿고 의지하지 못하게 됐을 것이다. 그때가 이렇게 그리운 이유가 여행을 못 가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 것인지, 그 착한 사람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눈만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던 내 해맑음이었는지 알 수없다. 분명한 것은 돌이켜보면 아슬아슬할지도 모르는 그때의 이 경험들과 사람들이 내 인생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냈다는 것밖에.

레몬을 파는 트럭도 예뻤다.
그 유명한 포지타노. 반대편 높은 곳에서 보거나, 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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