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원동 바히네 Jun 07. 2021

이탈리아어를 배우지 않았던 핑계

이태리 덕후의시골 산책6. 살레르노에서아그로폴리로

살레르노의 낮시간은 정말 할 일이 별로 없는 동네였다. 동네에서 만난 친구들은 해가 저물고 저녁시간이 되어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혼자서 살레르노 시내에서 괜스레 골목을 어슬렁어슬렁 다니기도 하고 점심을 먹고 부둣가에서 선탠을 하기도 했지만 에너지가 넘치던 스물두 살의 나는 이내 지루함을 느꼈다. 아침 일찍 아말피로 버스를 타고 나가 놀거나 기차를 타고 근처의 소도시를 돌아봤다. 아그로폴리는 살레르노에서 조금 더 남쪽에 있는 해변 마을이었다. 아말피처럼 예쁘진 않지만 선탠을 하기에 충분한 해변이 있고 그리스 시대의 신전을 관광할 수 있다고 해서 가보기로 했다. 


‘아텐찌오네!’ 이탈리아 여행을 하면 기차 플랫폼이나 공항 같은 데서 연신 들리는 소리다. 아마도 ‘집중(attention)’이겠거니 짐작을 할 뿐이다. 뒤 이어 들리는 말들은 어찌 됐건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타야 할 것이 제시간에 제대로 들어오는지 눈에 불을 켜고 전광판을 쳐다본다. 웅웅 울리는 실내공간에서 쉴 새 없이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 쏟아진다. 스피커에서도 말들이 쏟아지고, 사람들의 입에서도 말들이 쏟아진다.


나는 그 말들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다. 대충 손짓과 표정을 보고 '저 남녀는 싸우고 있네', '저 아저씨는 수화기 넘어의 누군가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네' 하고 짐작해본다. 그 누구도 나에게 다가와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묻지 않는다. 어깨에 가방들 걸고 있는 나는 연신 두리번거리고 있다. 이 기차를 타는 게 맞는지, 아니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살짝 들지만 이내 '기차를 잘못 타더라도 어쩔 수 없지 뭐'라고 생각해버린다.


기차 안은 반 정도 찼다. 내 자리를 찾아 앉는다. 나를 제외하고 모두가 말을 하고 있다. 모두가 자리를 찾아 앉으면 조용해지겠거니 했지만, 다들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열정적으로 쏟아낸다. 쿵기덕 쿵더러러러- 하는 리듬처럼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의 말에는 리듬이 있다. 그리고 그 리듬에 음계와 강세가 실린다. 화를 내던, 우는 아이를 타이르던, 오늘 가는 곳의 맛있는 식당에 대해 얘기를 하든 간에 그 말들은 리드미컬하게 기차 안을 채운다. 나는 어깨에서 가방들을 내려놓고 의자에 반쯤 눕는다. 엠씨스퀘어를 틀어놓고 책상 앞에 앉았던 고3 때처럼 사람들의 리드미컬한 말소리를 들으며 반쯤 나른해진다.


‘아텐찌오네!!!’ 어쩐지 보통의 아텐찌오네보다 화가 난 듯한 소리가 들린다. 잠깐 잠이 들었나 보다. 부스스 눈을 뜨니 사람들이 한층 큰 소리로 떠들고 있다. 뭔가 기차에 불이라도 난 것 같다. 모두가 격양되어 연신 팔을 위로 쳐들며 소리를 지른다.


“무슨 일이에요?” 

옆 자리에 앉은 정장을 입은 여자에게 물었다. 

“아, 기찻길에 새인지 토낀지가 앉아서 안 비키고 있어서 기차가 멈췄어요. 기장이 내려서 그 쪼그만한 애를 쫓아버리면 될 것을 스스로 비킬 때까지 기다리겠다잖아요 글쎄.” 


아마도 그 작은 동물 중 몇 마리가 기차에 치이는 사고가 있었고, 이 때문에 기차 부품의 하나가 고장이 난 듯했다. 기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베토벤 운명교향곡의 클라이맥스로 치닫은 듯이 더욱 격정적이고 카리스마틱 하게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머리의 중년 남성이 복도로 나와 솔로를 시작했다. 아마도 기장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이 멍청한 기장'으로 시작했다가 '이놈의 나라 것들은 기차에 에어컨도 제대로 안 달고 뭐하는 것이냐'며 부패한 정부를 욕했을 것이다. 아저씨는 급기야 2리터짜리 생수병에 가득 든 물을 본인의 머리에 들이붓기 시작했다. 연신 아저씨는 고함을 지르며 한참 물을 들이붓는가 싶더니 남은 물을 좌석에 앉아있던 우리에게도 퍼부었다. 싸이의 연말 콘서트를 방불캐 하듯 물을 맞은 사람들은 아저씨의 솔로 파트에 더해 함께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 아비규환의 상황이 그저 웃기기만 한 나와는 달리 출근길이었던 사람들, 어딘가를 꼭 가야 하는 사람들은 화가 단단히 나 보였다. 나는 한참이나 사람들이 화내는 모습을 구경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이지만 나는 다 알아듣고 있었다.


“남편이 차를 가지러 오기로 했어요. 같이 가요. 여기 앉아 있어 봤자 답이 없어.” 

정장을 입은 여자가 말했다.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허둥지둥 그 여자의 손에 이끌려 기차에서 내렸다. 여자의 남편이 가지고 온 차를 타고 빠르게 우리는 어디론가 향했다.


“아니 철도에 뭐가 있으면 치우고 갈 일이지.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그녀는 차 안에서 덜 풀린 화를 쏟아냈다. 

"어디 가는 길이에요? 내려줄게요."

"아, 저는 그냥 아그리폴리 해변에 가려고요. 여행 중이에요."

"그렇구나. 저는 아그리폴리 박물관에서 일해요. 해변이 너무 더우면 박물관에 놀러 와요. 3시부터는 시에스타니까 그전에 와요."

“네. 근데 아까 그 아저씨 너무 웃겼어요. 더운 데다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고 막 얼굴에 물을 뿌리더라고요.” 출근길이 늦어져 애가 타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시종일관 여행자의 태도로 일관했다.


"맘마미아. 나는 그걸 보지도 못했어. 아가씨 말이 맞아요. 웃긴 일이네. 정말 웃겨. 나는 그 웃긴 장면을 보지도 못했네. 그래 아가씨 말이 맞아. 웃긴 일이었어. 웃어넘기면 될 일이야."

"근데 저 아까 기차에서 잠들었었어요. 그렇게 시끄러운데... 못 알아들어서 그런가 봐요. 진짜 웃기죠." 

데시벨 측정기로 쟀으면 빨간색 범위에 눈금이 들어갔을법한 상황에서도 내가 꾸벅꾸벅 졸았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우습다.

"아가씨 마음이 소란하지 않아서 그런가 봐요."


여행지의 언어를 할 수 있으면 훨씬 편하게 여행할 수 있고, 아마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재미있는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배낭 하나를 달랑 매고 매번 혼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원할 때만 선택적으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름이나 겨울만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와 자연을 경험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이유도 있지만 그만큼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갈증 때문이기도 하다. 물리적으로 현재와 멀어지고 나면 편안하게 숨을 쉬며 낯선 곳에 놓인 나를 보게 된다. 돌아갈 곳과 때가 정해 진채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철저히 이방인으로 지내는 시간만큼 해방감이 느껴지는 것도 없다. 그 해방감은 내가 언어를 이해한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다른 모양으로 존재했을지 모른다. 나는 기차에서 사람들이 다이어트에 대해 집착하는 말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연예인 스캔들도, 습관처럼 내뱉는 회사와 일에 대한 한탄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아그리폴리로 가는 그 길이 그저 웃긴 하나의 장면으로만 남았을 뿐이다. 나는 사람들이 내뱉는 말을 나만의 언어로 해석해 그저 쾌활하고 유머러스한 그림으로 재구성했다.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끼면 외부와 단절되는 세상. 나는 이제 더 이상 언어를 공부하지 않을 핑계를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어렵사리 도착한 아그리폴리의 그리스 신전은 이태리나 그리스의 다른 신전에 비해 규모가 작고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며 아말피 해안에서 실컷 놀다 간 해변도 특별함을 느끼진 못했다. 아마 다시 돌아갈 일은 없겠지만, 아그로폴리로 가던 기차 안에서 느꼈던 에피소드는 가끔 꺼내 볼 때마다 원효대사의 해골바가지처럼 마음가짐을 달리해주고 있다. 

이전 05화 처음 본 낯선 여자의 집에 따라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