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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n 07. 2021

잡채, 좋아하세요?

이탈리아 시골산책 7. Mola di Bari 두 번째 이야기

잡채를 좋아한다. 간장과 참기름이 들어가서 맛이 없는 요리가 없지만, 그중에서도 잡채가 으뜸이다. 간장, 참기름, 그리고 약간의 황설탕- 특히 황설탕을 마스코바도 설탕으로 쓰면 풍미가 배가된다-을 섞어 소스를 만든다. 양파, 당근, 파프리카를 채 썰어 따로 볶는다. 살짝 숨이 죽을 정도로만 볶아 아삭함을 살리고, 마지막에 소금 간을 조금 한다. 소고기는 기름이 없는 부위를 간장, 후추, 마늘, 맛술, 꿀 조금을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볶는데, 중간에 표고버섯과 느타리버섯도 함께 볶아 간장 양념을 입힌다. 계란을 풀어 아주 약한 불에 얌전히 부쳐내고, 도마로 옮겨 식힌다. 완전히 식은 다음 채를 썰어야 망가트리지 않고 지단을 썰 수 있다. 고구마 전분 100%로 만들어진 당면을 물에 불려두었다가 끓는 물에 7분 정도 데친다. 끓는 물에 미리 간장을 조금 넣어 당면에 색을 입혀낸다. 당면이 익으면 재빨리 준비해둔 양념을 부어 섞어야 한다. 뜨거울 때 비비지 않으면 금세 불어 맛이 없다. 당면이 양념에 모두 코팅이 되어 윤이 나면, 볶아둔 부재료들을 한데 넣어 섞는다. 당면과 부재료들의 비율은 1:1 정도. 이 간단한 재료들을 볶고 섞기만 했는데, 모든 게 합쳐지면 새로운 맛을 낸다. 짭조름하고 살짝 단맛이 돌면서 참기름의 고소한 맛이 균형을 잡아주는 맛.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닌 미지근한 국수 요리. 나는 잡채를 사 먹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한정식 식당에서 반찬으로 나오는 잡채는 목이버섯 같은 고급 재료가 올라가 있지만 영 맛이 별로다. 너무 기름지고, 달고, 당면이 부재료에 비해 너무 많다. 어쩐지 시들하고 멋이 없는 맛이다. 독립하기 전에 엄마는 생일날이나 명절, 그냥 기분이 좋은 날이나 조카들이 원할 때 언제든 잡채를 만들어주셨다. 만들 때마다 아기 욕조만 한 통 가득 만들어 우리를 놀라게 했지만, 이걸 언제 다 먹냐고 투덜 대면서 삼일 안에 모두 먹어버리는 마성의 잡채. 나는 그 맛이 그리워서 독립 후에 혼자서도 심심하면 잡채를 만들어 먹는다. 


 잡채를 만드는 실력은 혼자 사는 햇수가 늘어갈수록 함께 늘어갔다. 엄마가 하던 양까진 아니지만, 한 번 만들 때 꽤나 많이 만들어 주변 친구들과 늘 나눠먹었다. 혼자 사는 애가 잡채를 양껏 만들어 나눠먹는 것이 예삿일은 아니었으니, 잡채를 선물 받은 지인들은 그 일을 조금은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편이다. 대게는 '아니 혼자 사는 애가 무슨 이런 걸 해서 나눠주고 그래'라는 반응이지만 잡채를 받아 든 얼굴은 꽤나 흡족해 보였다. 이후로 나는 종종 머핀이나 스콘, 쿠키를 구워 나누기도 했지만, 진짜 강력하고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 하는 날엔 잡채를 만들었다. 생일이나 명절에나 집에서 만든 잡채를 먹는 게 보통의 가정이었으니, 잡채를 만드는 나도, 받아 든 친구들도 그 날이 특별한 날로 만드는 나만의 장치였달까.


 잡채를 만들어 나누는 사람이 되겠다는 내 포부는 점점 더 커져갔고, 마침내 그 무대가 글로벌 무대로 확장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22살에 이탈리아 여행에서 만난 B&B 주인이자 쿠킹스쿨을 운영하는 친구 Rita를 보러 다시 가기로 했다. 나는 Rita에게 한국 국수 요리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엄마가 직접 담근 간장과 엄마 친구가 짜준 참기름으로 만드는 국수라고, 아마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Rita가 사는 곳은 'mola di Bari'라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이다.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위치 로보나 규모로 보나 경주 옆에 있는 안강읍 같은 느낌이다. 인구도 적고, 이탈리아 다운 화려한 건축물이나 역사적인 관광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해변이 있고, 시골인 만큼 물가가 매우 싸며, 무엇보다 내 친구 Rita의 집이 있는 곳이다. Rita의 집에 머물면 볼 수 있는 재미있는 광경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이 저녁 시간이 되면 약속이나 한 듯 Rita의 집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토마토 농사를 짓는 아저씨는 토마토를 한 박스 들고, 와이너리를 하는 아줌마네는 들통에 와인을 가득 채워 온다. 일손을 돕는 아줌마의 아들도 퇴근 후 자연스럽게 Rita네 집으로 온다. 그렇게 다 같이 세 시간이 넘도록 저녁식사를 천천히 즐긴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Rita가 만든 음식들로 다 함께 식사를 하며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내가 Rita네 집에 간 날 도착하자마자 근처 야채가게와 정육점에서 재료를 사 왔다. 재료를 길게 썰어 각각 볶고 양념을 만들었다. 토마토 아저씨, 와이너리 내외, 옆집 아들 내외가 모두 모였을 때, 나는 집에서 제일 큰 접시에 한가득 잡채를 내놨다. 파스타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들이니 산처럼 쌓인 국수 요리에 크게 충격받지는 않은 듯했다. 


 "너네 나라에선 이걸 언제, 어떻게 먹니? 매일 먹니? 파스타처럼?"

 "아, 그건 아니고, 생일이나 명절같이 특별한 날에만 먹어. 주로 다른 요리들과 함께 내놓고 밥과 같이 먹어."

 "국수를 밥이랑 먹는다고? 이게 국수인데 밥을 또 먹어?"

 "응. 탄수화물은 탄수화물이랑 먹어야 제일 맛있지. 한국은 밥과 국이 기본이고 나머지는 반찬이야."

 "이 특별한 국수 요리가 특별한 이유는 지혜의 엄마가 직접 담근 간장과 그 친구분이 만든 참기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야." Rita가 설명을 거들었다. 

 "명절에나 먹는 특별한 음식을 우리한테 해주겠다고, 세상에 그 양념들이랑 커다란 국수를 저 조그마한 애가 짊어지고 이 먼길을 왔더라니까. 우리는 참 복도 많지." 

 "맘마미아. 그래서 이 국수 이름이 뭐라고?"

 "잡채."

 "좝최" "잡체이" "답채" 

 "진짜 맛있다. 좝채. 벨리시모!" 

 "내가 나중에 이태리에서 잡채 집 열면 다들 많이 팔아줘야 돼요."


 친절한 시골 사람들은 내 잡채를 남김없이 싹싹 먹었다. 이걸 어떻게 만드느냐는 둥, 왜 이걸 생일이나 명절에만 먹냐는 둥, 엄마는 간장을 어떻게 만드시냐는 둥 질문이 쏟아졌다. 다정한 사람들. 나의 mola di bari 친구들. 내 잡채를 맛있게 먹어줬던 사람들. 손마디는 내 세배쯤 되고 손톱 밑은 까맣지만, 그 까만 손으로 내 손을 부여잡던 사람들. 어떻게든 이 국수 요리의 이름을 잘 말해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밋 '이태리 시골사람들한테 잡채 만들어 준 에피소드'를 흥겹게 얘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들. 밋하던 내 일상을 특별하게 만들어준 사람들. 이런 기억의 조각들은 인생에 튼튼한 곁가지들을 만들고 꽃을 피운다. 그리고 또 날카롭게 세워진 내 몸의 날들을 무디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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