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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Aug 26. 2021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오리 타히티를 추며 여성성에 대해 생각한다.

한강 가까이에 살아서 좋은 점은 언제든 산책이 필요할 때 한강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종종 해질녘 한강 공원을 산책하며 노을 보는 것을 즐긴다. 40분쯤 걷고 나면 핸드폰에 8천보 정도를 걸었다고 기록됐다. 그 정도면 적당히 소화도 되고 다리가 곧 뻐근해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몇 주 전 오랜만에 저녁 산책을 나갔다. 늘 걷던 코스를 걸었는데, 예전처럼 충분히 걸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밥 먹은 것이 소화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조금 더 걸을까 하다가, 갑자기 '뛰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뛰었다. 1분을 뛰고, 조금 걷다 2분을 뛰었다. 심장이 아프지 않았다. 어이없게도 눈물이 찔끔 났다.


빈혈은 심각성이 평가절하되는 대표적 질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죽을병은 아니니까, 듣는 사람도 나 스스로도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넘기는 정도였다. 하지만 심한 빈혈은 그야말로 내 인생을 갉아먹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업무 미팅으로 만났던 의사들 중 몇 명은 미팅을 잠시 중단하고 내 눈 밑을 열어보고선 심한 빈혈을 진단한 적이 있다.  내 빈혈의 원인이 자궁질환이라는 사실을 구태여 그 자리에서 말하기 싫었다. 너무 오랫동안 빈혈에 시달리다 보니 나조차도 '빈혈이 심한 나'에 익숙해져 그냥 별 것 아니라는 듯 어물쩡 넘어갔다. 대충 눈치를 챈 의사들은 '오랫동안 심한 빈혈이 있었으면, 심장에 무리가 많이 가니 꼭 치료를 하라'는 말을 거듭 반복했다. 고마운 말이지만 그때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악성빈혈은 스스로의 가능성을 차단하게 만들었다. 몸을 움직이려면 체내 산소가 필요하고, 그 산소는 적혈구가 운반을 하는데 나는 그 기능이 남들의 반도 되지 않았다. 의사도 나에게 유산소 운동을 금지시켰으니 나는 늘 내 몸을 쓰는 것에 대해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안돼', '못해', '위험해'라는 말을 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고, 나는 '운동을 안 좋아하는 사람', '운동 신경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내가 마음의 준비도 없이 뛰다니. 물론 1분, 2분이었지만. 뛰고 나서도 심장이 아프지 않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이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를 깨닫는 순간 억울함과 짜릿한 통쾌함이 한 데 뒤섞였다. 이 기분을 모르고 거의 10년을 살았다니. 마라톤 완주도 아니고 겨우 고작 1분 뛴 것 가지고 이렇게 감동씩이나 느낄 일인가 하는 마음과 함께, 이제라도 이렇게 멀쩡히 뛸 수 있다는 게 어딘가 싶기도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어디 한번 뛰어나 보자 싶어 인터벌 트레이닝 30분 프로그램을 차근차근해보고 있다. 내가 쉬지 않고 30분을 뛰는 날이 올까? 만약 그렇다면 꼭 나에게 매번 빈혈 주사를 처방하며 괴로워했던 의사에게 찾아가 감사인사를 전해야지.


수술 후 나는 그만뒀던 춤을 다시 추기 시작했다. 5년 전, 선유도공원에서 훌라 공연을 한 적이 있다. 훌라를 포함해 다양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낮부터 밤까지 공연을 하는 축제에 참가했다. 그때 우리 팀은 오후 공연이라 일찌감치 공연을 끝내고 밤늦게까지 같이 춤을 췄던 팀과 함께 축제를 즐기기로 했다. 그런데 공연 날 생리를 시작했다. 거대 근종과 자궁선근증을 가진 사람의 생리 첫날이란, 상상을 초월한다. 훌라춤을 출 때 입는 '파우'스커트는 볼륨감이 크기 때문에 큰 생리대를 착용해도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공연을 마쳐야 했다. 무슨 정신으로 춤을 췄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나중에 받아본 동영상 속의 나는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나는 택시를 불러 집으로 갔다. 같이 더 놀다가 가자는 언니들의 말에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그날 나는 응급실에 가서 수혈을 받았다.


체력이 달려 춤을 게을리 추는 사이 같이 춤을 추던 언니들은 하와이 훌라춤이 아닌 타히티의 '오리 타히티'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에는 같이 수업을 들었지만, 훌라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써서 하는 오리 타히티 수업을 내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격렬한 드럼 비트에 몸을 빠르게 움직이거나, 근육을 많이 써서 추는 느린 춤들은 숨이 달리고 어지러워 한곡을 완전히 출 수가 없었다. 수업도 따라가기 힘들어졌다. '간헐적' 댄서가 되었다. 그 사이 같이 춤을 시작했던 언니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해 공연도 활발하게 하고 타히티에 여행을 함께 가기도 했다.


하와이 훌라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타히티의 오리 타히티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다. 모르고 보면 비슷한 점이 많다. 훌라가 좀 더 관광객을 위한 공연 같은 이미지로 자리 잡긴 했지만,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설명하듯 훌라는 하와이의 섬사람들의 뿌리이자 생활 그 자체인 전통 민속춤이다. 오리 타히티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의 터전인 섬과 바다, 하늘, 자연,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에 대한 소중한 마음과 경외, 평화와 선량함을 노래하고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현대적 시선으로 보면 과장스럽게 보일지도 모르는 과감한 패턴이나 색상의 의상을 입고, 큰 꽃이나 머리장식을 하고 추는 점도 좋았다. '세련되고 유행에 맞는' 옷을 남의 시선에 맞춰 입어야 한다는 압박이나 고민 없이 과감하게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오리 타히티는 조금 더 '원시적'인 면모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타히티에서 춤을 추는 댄서들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들을 이용해 손으로 공연 복장을 직접 만든다. 코코넛으로 브라를 만들고, 풀들을 엮어 치마로 만들어 입는다. 생화를 실로 엮어 목에 걸고 춤을 춘다. 그런 복장으로 타히티의 아름다움에 대해, 타히티의 꽃에 대해, 타히티의 아름다운 여성에 대해 찬양하고 춤춘다. 매일 온갖 부정적인 사건사고와 뉴스들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타히티 춤을 배우러 가면 그 공간 안에서 만큼은 아름다운 섬과, 자연과,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내가 제대로 춤을 추지 못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마 가르치는 선생님은 속이 터졌을지 몰라도, 나는 그냥 스트레칭만 하러 가도 좋았다. 환기도 잘 안 되는 지하 연습실이지만 나른한 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바깥에서 있었던 일은 까맣게 잊혔다. 옆집에 소녀가 예쁘고, 타히티의 꽃이 향긋하고, 바람이 아름답고, 춤추는 소녀가 아름답다는데 세상 무슨 일이 더 중요하겠는가.


수술 후 빈혈이 정상수치가 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나는 다시 춤을 추러 갔다. 예전처럼 스트레칭만 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저 다시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 틈에 껴서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배에 남은 수술 자국을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지만, 아무도 내 배에 난 상처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사이 불어난 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브라탑을 입고 얇은 천 하나를 엉덩이에 두르고 춤을 추지만 우리는 서로의 몸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나는 그 속에서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춤을 출 수 있었다.


오리 타히티 댄서들의 사진이나 영상을 본 내 주변인들은 제일 먼저 공연이나 연습 복장에 충격을 받는다. 노출이 많고 화려한 의상을 입는 것이 몹시도 생경한 눈치다. 훌라 공연보다 오리 타히티 공연 의상은 더 노출이 많은 편이다. 춤을 추는 이들은 그 의상이 자연스러운데,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다를 때가 많다. 맨살이나 몸이 라인이 드러나는 의상은 어김없이 '섹슈얼'하게 비친다. 살풀이를 출 때 하얀 한복을 입듯, 오리 타히티를 출 때는 그에 맞는 옷을 입는 것뿐인데, 몸에 대한 시선, 특히나 여성의 몸에 대한 시선은 어쩐지 늘 한쪽으로만 치우쳐있다.


요시고 사진전에서 본 유럽의 바다 풍경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구조와 색감도 물론이지만 수영복을 입은 노인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우리나라의 해변은 곧 몸이 아름다운 젊은이들의 것, 조금 확장해 봤자 어린아이들의 모래장난의 터전 정도로만 사용되는 것이 어쩐지 아쉽다. 이태리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들이 가벼운 도시락을 싸와 수영복을 입고 태양 볕 아래 그야말로 '휴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토플리스가 흔한 스페인이나 프랑스 바다에 가면 토플리스로 태양을 즐기기도 한다. 내리쬐는 태양의 에너지를 받고 있으면 내면의 에너지가 살아나 움직이는 듯하다. 실제로 햇볕을 쬐는 것이 성호르몬을 증가시기키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다와 태양을 즐기는데 어떤 몸의 자격도 필요하지 않다. (Yosigo instagram)


타히티에서도 토플리스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오리 타히티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같이 춤을 추는 팀 안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입지 않은 상태로 무대를 준비하기도 한다고. 그 누구도 너의 가슴이 크네, 작네, 예쁘네, 별로네라는 판단이나, 옷을 입어야 하는 곳에서 왜 옷을 벗고 있냐는 핀잔을 하지 않으니 벗은 몸이 이상할 리 없다고 했다. 태평양의 흑진주라 불리는 대자연에서 느린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벗은 몸은 그저 삶의 일부일 뿐이다.


우연히 본 사진. 타히티인지 알 수 없지만, 폴리네시아 지역인 것 같다. 이곳에서 벗은 몸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다.


춤을 다시 추기 시작하면서 내 여성성에 대한 생각이 명확해지고 있다. '자궁이 없는 여성'의 여성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굳이 정의를 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다가도, 한 번씩 의심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무심히 스며 올랐다. 자궁적출을 여성성의 종말로 생각하는 사람들, 자궁 적출 후에 기를 쓰고 겉으로 드러나는 '여성성'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들을 보며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탄력 있는 가슴과 엉덩이를 잃지 않기 위해, 혹은 남편과의 잠자리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여러 노력들을 한다. 대부분은 건강기능식품을 먹고, 살이 찌지 않기 위해 운동을 하거나, 아름다운 피부를 위해 피부과 시술을 받는 식이다. 나의 여성성은 어디에 있을까? 나도 이런 노력들을 해야 하나?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 그에 걸맞게 '섹스를 하고 싶은' 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나? 아이를 낳지 않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성에게 여성성은 어떻게 정의될까?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저)>에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시간이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닌, 임신 가능성의 종료점을 향해간다고, 이것이 곧 남성과 여성의 권력구조를 형성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개인의 선택을 가름하는 문화적으로 가장 두드러진 카테고리인 생리시계는 여성이 선택을 받는 아키텍처의 근간이라는 저자의 주장을 읽고, 어쩌면 나는 완전히 임신 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불확실했던 내 여성성에 대한 확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술을 결심하기 전부터 나는 '비혼 무자녀'의 삶을 택했다고 확신했지만, 마음 한편에는 계속 어떠한 '가능성'이라는 여지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째깍째깍 흘러가는 생체시계가 얼마 남지 않은 30대 중반의 여성인 나는 남성에게 '섹시한' 여성으로서, 그들이 '원하는'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집착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던 것이다. 수술과 함께 출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나니, 나는 나의 여성성을 드디어 오롯이 내 안에서 찾게 됐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내면의 정체성과 힘을 찾아내는 깨달음의 어떤 순간이 찾아올 텐데, 나에게는 수술이 큰 역할을 했다. 누구에게도 섹스어필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언젠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몸을 과시하지 않아도 되며, 생체시계의 타이머가 째깍거리는 것에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에서 오히려 나는 두려움보다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면서 내 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을 하게 됐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오리 타히티를 멋지게 추는 '여성'댄서가 될 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함께.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라는 강지혜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페이지를 더 넘기지 못하고 붙잡고 있었던 구절이 있다.

분명한 건, 분명한 것. 확신에 찰 수 있는 것. 나는 내가 시인이라는 것에 확신을 느낀다. 나는 내가 아이를 키우는 여자라는 것에 확신을 느낀다. 나는 내가 큰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것에 확신을 느낀다. 나는 낮에는 돌봄 노동과 숙소 관리를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일상을 보낸다는 것에 확신을 느낀다. 나는 내가 제주도에 살고 있다는 것에 확신을 느낀다. 내게 확신을 주는 것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한다.
                                                                                       - 오늘의 섬을 시작합니다 중에서

나는 이 문장들을 읽으며 몹시 놀랐다가, 부러웠다가, 곧 나를 의심했었다. '확신'이라는 말. 얼마나 두려운 말이었던가. 더군다나 나에 대한 확신이라니. 뾰족하고 위태롭고 불안했던 나는 스스로에 대해 무엇을 확신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유치하게도 나는 책에 나온 구절에 나를 끼워 맞춰봤다. 나는 내가 망원동에 살지만 언제 이사를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나는 내가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직업 요리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동물을 키우지 않았으니 개를 키우는 사람이란 확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책을 처음 읽고 반년쯤 지난 지금, 나는 나에 대해 많은 것들을 확신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확신은, 나는 포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완전히 회복한 강인한 여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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