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신들과 영웅들과 시간을 먹는다
고양이와 살다가 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나도 같은 사람으로
사람들과 살면서는
믿기 어려웠는데
고양이가 의도를 가졌는지
본능에 따랐을 뿐인지
는 잘 모르겠는데
고양이와 살면서 보니
영혼이 정말 있는지도......
몸이 있는 이 유기적 존재가
그 그릇이어서
물, 곧 영혼을 담은 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럴 것 같다고
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다
몸은
뚜껑이 없는 그릇이라
영혼은
흐를수밖에 없지
가볍게 걷기만 해도, 찰랑
바닥을 적시고 흔적을 남겨
그럴진대 살면서 뛰거나
걷거다 눕기도 하는거야 부지기수
그러니 영혼은
남아나지 않아
땅에 고수레 하는 셈이야
흔들리고 넘쳐
흘러내리는 것이 자연스러우니
바닥이 드러나면 채우면 돼
다만 문제는
값을 어떻게 치르는지 모른다는 것
작은 방
넓은 벽 앞에 선 고양이는
영혼의 바텐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면
한잔 만들어줄지도 모르지
하루 낮과 밤을 지나며
땅과 하늘이 호흡하여 만들어낸
감로수(甘露水)를
ㅡ 경험 이전에 배운 개념은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쓰면서 안다고 생각한다. 우주만한 느낌의 바다를 헤엄친다면 우리는 그곳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한두 방울의 말인 개념으로 그것을 채집해놓을 때 안다고 생각해버리는 것보다는 그 경험 자체가 나은 것은 아닐까? 느낌의 바다. 영혼을 생각하면 그렇다. 그건 설명하기 난처한 것이다. 그것은 설명이나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그 안에서 푹 들어가 느껴야만 되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영혼을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의 경험은 그래서 소중하다. 그리고 과연, 시(쓰기)는 내면을 정리하는 왕도로써 내 안에 언거번거한 오케스트라를 단숨에 휘어잡는 지휘자의 손짓이다.
아주 오래 나는 개념적 사고가 갖는 안정성에 꽤나 몰입하며 살았는데 나의 불확실성, 느낌의 휘발성을 불안의 요깃거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꿈을 다루면서 바뀌었다. 그후로 나는 경험주의를 받아들이게 됐고, 그후로 적어도 일정 부분, 머리로 꼭 쥐고 있던 것들에 대해 힘을 풀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