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시간』
홋타 요시에 지음, 박현덕 옮김, 글항아리, 2020
『시간』은 난징대학살을 다룬 소설로, 1937년 11월 30일부터 1938년 10월 3일까지 소설 속 서술자이자 난징대학살을 겪은 천잉디가 드문드문 써 내려간 17편의 일기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시간’은 서술자인 천잉디의 일기 속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화두다. 시간은 자연에게도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흐르지만,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고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느끼는 것은 인간뿐이다(“우리의 온갖 행위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의 도입부, 천잉디는 석양에 비친 쯔진산(난징의 중심부에 있는 산)을 보며 새삼스레 아름다움을 느낀다. 곧 도래할 학살의 시간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인간의 역사 이전부터 그리고 역사 이후에도 그러할 것처럼” 쯔진산은 초연하게 빛난다. 그래서일까. 자연의 시간은 비정하다.
난징대학살의 광풍 속에서 천잉디는 아내 모처우와 그 배 속에 있던 9개월의 아이와 다섯 살 잉우를 잃었고,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목격했다. 학살은 인간의 시간을 앗아가 자연의 시간으로 만든다. 죽음은 인간을 물질로 만들기 때문이다(“그녀는 죽었다. 죽어서 물질이 되었다”). 그는 그 죽음들에 대하여 이렇게 쓴다. “이유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에게, 물고기의 눈이 되어 본 풍경은 황량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무의미하다. 풀이 있건, 나무가 있건, 눈이 오건 오지 않건, 그것은 바위와 금속으로 된 풍경에 지나지 않는다.”
“바위와 금속으로 된 풍경”이란 시간이 흐르지 않는 풍경이다. 학살 속에서 살아남아 버린 인간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라는 참혹함을 뼈저리게 체험한다. 학살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천잉디는 천우신조로 학살에서 살아남아 자신이 살던 집에 눌러앉은 일본군 장교의 하인이 된다. 동시에 그는 집의 지하실에서 무전으로 일본군에 대한 정보를 송신하는 비밀요원이기도 하다. 피점령지의 인간은 학살자에게 굴종하는 노예로서의 일상과 요원으로서 무전을 보내는 일상을 동시에 살아간다.
전쟁은 죽은 자들의 시간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남은 자들의 시간마저 분열시키고, 그 갈라진 틈을 고통으로 채운다. 천잉디 또한 그 견딜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때때로 “바위와 금속으로 된 풍경”으로 회피하려 하지만, 그래도 끈질기게 인간의 시간을 살아나가려 한다. 시간의 정지는 곧 사유의 정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유의 정지는 곧 ‘숙명론’으로 이어진다.
숙명론은 학살이 초래한 그 모든 죽음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전쟁에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는 태도다. “모르겠다……”면서 더는 죽음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저 ‘고이 잠드소서’와 같은 무감한 애도의 말로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을 끝마치고, “인간을 물질의 질서 속”으로 편입시킨다. “전쟁 수단의 발전은 아마도 점점 인간을 물질화시킬 것이”라거나, “숙명론자가 민중 속에서 끊이지 않고 생겨나는 이상, 전쟁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어떤 평화도 결코 평화가 아니”라는 천잉디의 사유는 지금 사회에서도 정확하게 들어맞는 지적이다.
천잉디는 이렇게 쓴다. “싸우지 않는 한 우리는 진실조차 지키지 못하고, 그것을 역사가에게 알리는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천잉디가 일기를 통해 전쟁과 학살, 피점령자로서의 생활에 대한 사유를 집요하게 이어나갔던 태도야말로, 숙명론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 참혹한 역사의 진실을 후대에 알리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싸움’이 필사의 의지를 가진, 결기 어린 자들만의 싸움은 아닐 것이다. 천잉디는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는 농부에게서도 싸움의 모습을 발견한다. 학살의 공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현장에서는, 그저 땅을 갈고 풀을 베는 것 같은 일상의 노동 그 자체로도 어떤 저항의 움직임이 된다.
이 소설에 대해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저자인 홋타 요시에의 위치다. 집단학살과 같은 참극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서술자의 위치가 중요하다. 그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에 따라 그 내용은 완전히 달라진다. 홋타 요시에는 난징대학살의 가해국인 일본 국민이자, 실제 중일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었다. 저자의 신상으로만 보면 이 소설이 가해자의 위치에서 쓰였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소설 속 서술자인 ‘천잉디’는 난징대학살의 피해자다. 『시간』은 가해자가 피해자의 시각으로 쓴 학살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난징에서만 수만 명의 사람을 능욕한 인간들은 그들 자신과의 싸움과 그 의지를 모조리 내다 버린 인간들이었다”는 이 신랄한 비판은, 천잉디가 아니라 저자인 홋타 요시에의 관점에서는 통렬한 자기비판이기도 하다.
지금도 우리는 곳곳에서 역사부정 혹은 역사수정주의라는, “자신과의 싸움과 그 의지를 모조리 내다버린” 사람들의 역사 인식을 보고 있다(꼭 일본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시간은 그 학살의 시간에서 그대로 멈춰 있다. 그렇기에 언제라도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 학살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소설이 발표된 1955년부터 66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간』이 지닌 특별함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