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잔, 그리고 새벽 [완결]

by 황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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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림자가 떠난 뒤, 카페는 처음처럼 고요했다. 그러나 그 고요는 공허가 아니라, 긴 시간 끝에 찾아온 안도였다. 나는 카운터 뒤에 서서 텅 빈 잔을 바라보았다. 잔은 비어 있었지만, 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직 한 잔이 더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가장 오래된 원두를 꺼냈다. 세월의 깊이가 스며든, 묵직하고도 부드러운 향. 물은 조용히 끓어올랐고, 잔은 따뜻하게 데워졌다. 이번 잔은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떠난 손님을 위해서도, 도시에 남은 그림자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 잔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노트를 펼쳐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나는 바리스타 채은. 나는 수많은 마지막을 지켜봤다. 그리고 이제, 나의 마지막 잔을 기록한다.” 펜을 내려놓자, 노트는 스스로 닫혔다. 마치 모든 이야기가 완결되었다는 듯. 나는 잔을 들었다. 커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쓴맛 속에 숨어 있던 달콤함, 마지막까지 남은 따스함. 그 순간, 문턱 위 종이 은은히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문이 열리지 않았다. 종소리는 단지 새벽의 시작을 알릴 뿐이었다. 창밖 하늘이 서서히 밝아졌다. 도시 위로 첫 햇살이 번져갔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속삭였다. “이제, 보내줄 수 있겠구나.” 새벽의 빛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 자리에서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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