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놀이터 앞에서 경비실 가는 길에 있는 벚나무 가지가 꺾여 바람에 흔들린다. 땅을 향해 처진 나뭇가지를 당겨보았다. 빗물을 머금은 수피 탓인지 완전히 꺾이지 않았다. 나뭇가지는 어른이 나무 아래로 지나가면 목이 부딪힐 정도로 바닥으로 처쳐있다. 그러니까 아이들 눈높이 정도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가 흔들리는 것이다. 그때 전방에서 자전거를 타며너 한 손엔 휴대폰을 든 초등학생이 비틀비틀 나뭇가지 앞으로 다가오더니 순간 놀라 휴대폰 보기를 멈추고 아슬아슬 비켜갔다. 나는 아파트 출입구 경비실로 향했다. 경비원이 먼저 방충망을 열며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나는 90도로 몸을 틀어 손가락으로 벚나무를 가리켰다. 가지가 꺾여서 도로로 처져있는데 그게 아이들 얼굴 높이라 위험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자, 경비원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아파트를 벗어나 건강공원을 지나 우듬지 탐방로가 있는 야산 산책로에 들어섰다. 벌레 먹은 잎이 잔뜩 있는 오동나무 옆에서 층층나무를 발견했다. 한 해 한 층씩 층을 높인다는 층층나무는 아버지로 인해 알게 된 나무다. 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무렵 화단 앞에 층층나무를 심었다. 당시 나무에 관심이 없던 때였는데 어느 날 마당 한 켠에서 가녀린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층층나무의 발견이 아버지가 심은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 같다. 아버지는 그 나무를 층층 나무라고 했으며 어린 나무를 선산에서 캐와 심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나무가 처마 높이로 자랄 때까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더 나이가 들어 서른 살이 훨씬 넘었을 무렵 아버지는 무릎 한 쪽이 불편해졌고 산책할 때 지팡이가 필요해졌다. 그때 지팡이로 처음 사용했던 나무가 층층나무의 한 가지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층층나무를 보면 아버지와 아버지가 심은 층층나무와 지팡이가 떠오른다.
층층나무 옆엔 우듬지 산책로에서 가장 먼저 가을 소식을 전하는 붉나무도 있다. 붉나무는 키가 별로 크지 않는 낙엽활엽수로 낮은 산기슭에 서식하며 가을이 되면 잎이 다른 나무들보다 먼저 붉게 물들어 불리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내가 붉나무를 알기 된 것은 7년 전 가을, 잎들이 아직 푸르를 때 우듬지 산책로를 걷다가 선명한 붉은 잎을 발견했다. 자주 걷는 우듬지 탐방로에서 가장 먼저 가을 소식을 전하는 붉나무는 가을이면 언제나 잎을 붉게 물들여 내게 어머니를 소환해 낸다.
왕복 2시간의 등하굣길과 지나치게 건조한 피부 탓이었던지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겨울이면 자주 발뒤꿈치가 트곤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뒷산에서 엄지손가락보다도 굵은 붉나무를 팔뚝만 한 길이로 잘라와서는 부엌칼로 쓱쓱 칼집을 내서 은근한 화롯불에 얹어놓고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아궁이엔 장작이 타오르고 그 아궁이 앞 화롯불 위엔 상처 난 붉나무 수피에서 하얀 진액이 새어 나왔다. 나는 부엌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붉나무 서너 개를 화롯불에 걸쳐놓고 진액이 골고루 나오도록 돌려가면서 그 진액을 조금씩 한지에 발라 내 뒤꿈치에 붙여주며 양말을 신고 자라고 했다. 그러면 다음 날 갈라진 뒤꿈치가 덜 아픈 것 같고 금세 아물곤 했다.
나는 마흔이 넘어 산책길에 본 붉은 잎의 나무가 붉나무라는 걸 처음 알았고 붉나무의 효능에 대해 찾아보니 항균작용이 있어 각종 피부질환에 쓰인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약이 귀하던 시절에 어머니가 내게 했던 치료방법이 옳았음을 안 것이다. 한편 나는 어려서 고기와 특정 음식을 먹으면 두드러기로 자주 고생을 했는데 어머니는 그렇게 두드러기가 나기만 하면 나를 발가벗겨 아궁이 앞에 세워놓고 하얀 소금으로 온몸을 문지르며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중얼중얼 외웠다. 당시 그 주문은 내게 '헌 집 줄게 새집 다오'처럼, '헌 피부 줄게 새 피부 다오' 라는 말로 들렸다. 당시 병원이 없는 산골에서 해야 했던 최선의 치료방법이었으리라. 아궁이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을 쬐며 소금을 이용한 민간요법으로 피부 진정을 도우려 했던 어머니는 그렇게 민간요법에 의지해 조금이나마 병으로부터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한 것 같다. 그 방법이 옳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활활 타다 잦아드는 장작의 불덩이가 스러질 무렵 가려움이 덜 해진 것 같았고, 아직 열이 식지 않은 몸으로 툇마루에 누워 몇 시간을 꼬박 자고 일어나면 붓기가 점차 가라앉는 걸 느꼈다.
붉나무는 열매에 짠 성분이 들어있어 소금이 귀하던 시절 소금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때 내 몸에 문지르던 것이 소금이었는지 붉나무의 열매였는지 나는 지금 확인할 길이 없어 모르지만 붉나무를 볼 때면 타닥타닥 튀어 오르던 하얀 소금 가루 그리고 붉나무 수피 진액이 숯불에 떨어지며 치지직 내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멀리서 보이는 붉나무꽃은 마치 그때의 소금 가루가처럼 자잘하고 하얬다.
오늘은 광복절이고 말복이다. 붉나무 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계절이다. 붉나무 꽃이 피었다는 건 곧 가을이 머지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습한 물기를 온몸 가득 머금고 공원 한 바퀴를 더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갈 때 보았던 벚나무의 늘어진 가지가 사라졌다. 경비실 쪽창이 열려있고 경비원이 나를 본다. 의자를 한껏 뒤로 젖히고 몸을 눕혀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모습에서 민원을 해결했다는 뿌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보답이라도 하듯 벚나무 아래를 지날 때 꺾인 가지가 사라진 나무를 한 번 쳐다보았다.
오늘은 그렇게 벚나무에서 시작해 층층나무 옆 붉나무를 지나 다시 벚나무 아래에서 산책을 마쳤다. 내게 22년 8월 15일의 산책길은 붉나무 꽃이 소금처럼 피고 산책길에서 층층나무를 발견한 날로도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