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은 어떻게 삶을 사랑하게 하나?

가혹한 시련조차 성장의 기회가 되기도 해

22년 8월, 서울 경기권에 11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다. 저지대는 침수되고 인명피해도 생겼다. 많은 재난은 가난과 연결되는 것 같고, 어려운 사람에게 더 큰 피해를 주는 것 같다. 그렇게 또 살아보지 못한 2022년의 여름이 지나고 있다.

이른 아침 선책을 나섰다. 며칠간쏟아지던 폭우가 남기고 간 산책길은 곳곳이 파이고 뜯기고 여기저기 상처로 얼룩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푸르러진 버드나무에서는 싱그러움과 함께 오히려 강한 생명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다리 밑을 지나다가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을 발견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 지점에만 집중하면 마치 비 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처럼 보였다. 비가 그치고도 물이 흐르지 않던 곳에 물이 떨어진다는 건 고여있는 물이 아직 있다는 뜻일 테다. 나는 그 다리 아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의 파동과 소리가 좋아 한참을 서서 빗물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엔 게이트볼장이 있는데 한쪽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 한 분이 게이트볼 연습을 하고 있었다. 떨어지는 빗물의 규칙적인 소리와 게이트 볼이 스틱이 부딪치는 리듬의 조화는 아침을 깨우는 단정한 소리처럼 들렸다. 반대편 운동 기구에는 언제나 그렇듯 근력 소실을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어르신들이 기구마다 한 명씩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운동기구가 설치된 곳에서 실개천과 잔디밭 사잇길로 접어들면 낮은 야산으로 이어진다. 나는 그 오솔길을 지나 호수공원으로 들어가는 걸 좋아한다. 마치 공중목욕탕에 가면 탕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한 번 씻고 탕에 들어가는 것처럼 산책을 할 때 나무가 있는 숲길을 잠시 들어가는 것은 풀과 나무 향기로 몸을 샤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면 비로소 몸과 마음이 맑게 깨어나 또 새로운 하루를 선물받은 느낌마저 든다.

강아지는 젖은 나무에게서 나는 냄새를 평소보다 더 오래 맡으면서도 오랜만의 산책에 흥분한 나머지 나를 앞섰다. 옹이 구멍에 코를 넣어보기도 하고, 풀숲에 코를 처박고 무언가 찾으려 애쓰는 것 같기도 했다.

98%의 습한 공기를 뚫고 걸어도 시원한 느낌이 드는 건 그만큼 며칠 동안 내린 많은 비가 어느 정도 열기를 가져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나무들이 울창한 곳에선 보도블록을 걸을 때보다 같은 습도라도 온도가 낮아 덜 습하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200여 미터 숲길을 걷고 호수공원으로 들어섰다.

가로등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는 며칠 새 한 뼘은 더 자란 듯 보였고, 키 작은 버드나무는 새로 난 연둣빛 잎을 돋워내 바닥까지 가지를 늘어뜨렸다. 작은 버드나무 한 그루는 마치 봄비를 실컷 머금고 새싹을 돋워낸 것처럼 연둣빛 잎을 바람에 나긋나긋 흔들고 있었다.

나는 몇 발자국 걷다가 발견한 호수의 펜스에 걸쳐있는 부유물을 보기 전까지는 호수에 얼마나 많은 물이 차올랐었는지는 추측하지 못했다. 호수 산책길에서 마주한 이곳저곳에서 폭우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걸을 때 모든 풍경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며 걸을 수도 있고, 나무만 보며 걸을 수도 있고, 나무와 그 주변 풀들을 함께 보고 걸을 수도 있다. 풀들의 변화만 관찰하며 걸을 수도 있고, 고인 물과 무른 땅을 피하며 걸을 수도 있고, 호수의 부유물이나 토사의 형태를 관찰하며 걸을 수도 있다. 즉 모든 걸 함께 볼 수도 있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걸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같은 곳을 걸어도 보는 것은 모두 다르지만 아무리 주변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비 온 후, 눈 온 후, 폭풍이 지난 후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변화된 모습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자주 걸었던 길은 자주 만났던 사람의 변화를 알아채는 것 같다. 그래서 자주 보았던 것은 사람이든 풍경이든 아픔을 겪고난 후의 변화를 알게 되는 것이다.

폭우가 지나간 후 변화한 풍경을 통해 소멸의 아픔과 생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게 하는 아침이다. 나보다 먼저 떠날 확률이 높은 생기 발랄 두 살 강아지가 옆에 있어 더욱.

어떤 힘든 일을 겪고 나면 성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려는 사람이 있다. 그럴 때 멈춰 서서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려는 노력을 하면 어느 부분이 더 많은 상처를 남겼는지, 바로 그 옆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폭우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나무들은 어느 위치에 있었느냐에 따라 폭우가 지나간 상흔을 남기지 않고 오히려 성장한 나무도 있다. 초췌한 모습으로 겨우 살아난 나무가 있는가 하면 아예 쓰러져 다시 살아갈 힘을 잃은 나무도 있다.

나는 물가를 걷다가 쓰러져 뿌리가 뽑히고 가지가 부러진 버드나무 한 그루에서 어미 오리 새끼오리 다섯 마리를 발견했다. 알을 깬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오리는 아직 솜털인 채로 나뭇가지 아래 풀숲에 오글오글 모여 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경이로웠다.

누군가의 운이 없음은 누군가에게 기회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의 희생은 누군가에겐 안식처가 되어 주기도 한다. 부러진 버드나무가 오리들의 보금자리가 된 것처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오늘 살아 있는건 고마운 일이며 경탄할 일이다. 누군가가 나의 둥지가 되어주는 것이므로.

지금 괴롭다면 아무 것도 하기 싫다면 일단 그곳이 어디라도 걸어보자. 무엇인가 발견하는 기쁨을 찾게 될 것이다. 자연 곳곳에서 내가 살고 있는 둥지보다 못한 곳에서도 생명은 잉태하고 삶을 이어간다는 걸 발견할 것이다.

살다보면 누군가는 내 가족 또는 주변에 나를 이끌어 줄 어른과 환경이 형편없다 생각될 때가 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그런 시간인 것 같다면 언젠가 그 시간은 끝이 나게 돼 있다. 그러니, 일단 어제를 지우며 내일은 잊고 오늘을 살아보도록 하자. 그런 당신은 폭풍이 지나간 후 살아남은 새끼 오리들보다 분명 강인한 존재가 틀림없으니까.

흰빰검둥오리야

너와 새끼들이 무사해 다행이야

너로 인해 이 호수는

더욱 넉넉해질테고,

나는 이곳을 지날때마다

너희들을 떠올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