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서는데 주차장 눈이 녹으며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주차장 지붕아래 참새 한 마리가 얼음판에 앉아 부리를 잔뜩 기울이는가 싶더니 포르르 날아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물이 떨어지는 그 지점에 엄지손톱 만한 크기로 얼음이 녹아서 파여 있었고 그 파인 곳에 물이 쬐끔 고여있던 것이다. 새는 그 고인 물을 마시려고 얼음에 앉았던 것이고 물이 아주 조금밖에 고여있지 않다 보니 부리를 기울여 대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던 것이다.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처음엔 새가 한 마리인 줄 알았는데 바로 옆 나무에 또 한 마리가 있었다. 새 두 마리는 물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한 마리씩 번갈아 날아와서 물을 마시고 날아가고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한꺼번에 둘이 부리를 맞대고 먹을 정도의 양과 물의 깊이가 되지 못하니 지붕에서 한 방울이 떨어지면 한 마리가 얼른 날아가 마시고 다른 새는 나무에 앉아 기다리다가 먼저 마신 새가 날아가면 그제야 내려와 물을 찍어먹는 것이다. 나는 그 순간 작은 생명체로부터 경이로움을 느꼈다. 물 한 모금을 위한 그 여러 번의 날갯짓과 서로의 규칙 지키기, 물 한 모금을 위해 얼음에 부리를 기울이는 그 몸짓에 잠시 넋을 놓고 구경을 했다. 산책을 하기도 전에 하루 산책을 다 한 것처럼 마음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새들에게 눈을 맞추며 쪼그려 앉아 운동화 끈을 느리게 조여 맸다. 언제나 그렇듯 문밖을 나가면 자연은 어제와 다른 말을 건다.
"너도 우리 만큼 살고 있니?" 새가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고인돌길 은사시나무와 아카시 나무
어제는 화살나무 아래서 '새집'을 줍고 오늘은 참나무 아래서 '깃털'을 주웠다.
깃털이 따스했다. 방금 빠진 깃털임을 알 수 있었고 꿩의 깃털로 추정되었다. 인근 공원 풀숲에는 꿩들이 서식하여 산책길에 자주 꿩을 목격한다. 꿩은 주로 낙엽이 쌓인 잡목숲에 서식한다.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데 날아가더라도 아주 멀리 높이 날지는 못한다. 다른 새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곡선으로 나는 것과는 달리 꿩은 사선으로 날아 나무에 앉기보다는 다시 덤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우리 동네 산책길에서 자주 만나는 새는 까치, 직박구리, 박새, 그다음이 꿩이다.
도처에 널린 것이 길이다. 길이 없다면, 만들면서 걸으면 그만이다. 이미 공원 산책길은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이 여기저기 오솔길을 만들어놓았다. 내가 걷는 길은 정해져 있고, 나는 늘 걷는 길을 걷지만 단조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보이는 풍경이 매일 달라지는 건 물론이고 나 조차도 매일 다른 감각으로 걷기 때문이다. 어제는 집 앞 공원, 화살나무가 구불구불 이어져있고 적당한 간격으로 버드나무가 있어 단조롭지 않은 공원길에서 새집을 주웠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오므리면 딱 내 손에 잡힐 만한 집이다. 마른풀로 만들어 폭신한데 촘촘하고 탄력이 있다. 떨어뜨려도 부서지지 않는다. 가벼운 것은 그렇다. 어떤 새의 집인지 모르지만 집이 작으니 새도 작을 것이다. 박새의 집으로 추정도 되었다. 산책을 하다 보면 새집을 자주 목격하는데 집 크기가 커서인지 까치집이 제일 많이 눈에 띈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살펴보면 작은 새집도 종종 볼 수 있는데 언젠가 담쟁이넝쿨과 칡넝쿨에서 새집을 본 적이 있다. 넝쿨들이 출렁거려 움직일 텐데도 새들이 거기에 집을 짓는 것은 그만큼 그곳이 안전할 거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움직이긴 하지만 넝쿨 식물의 줄기와 잎들이 복잡하게 엉켜있어 포식자의 눈을 피하려는 것일 테다.
즐겁게 산책하는 법 중 하나로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걷기도 한다. 늘 같은 새라도 별안간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듣게 될 때가 있다. 새들이 하는 말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고 계절과 날씨에 따라 다르다. 다른 새를 부르는 소리일 수도 있고, 흥에 겨워 지저귀는 그야말로 노래일 수 있고, 위험을 알리는 신호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한 마리의 새를 발견하면 주변에서 또 다른 새를 발견해 낼 가능성이 높다. 그 새는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지저귀는지 서로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지를 추측하며 산책하는 것도 심심하지 않게 산책하는 법 중 하나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늘 그 자리에 서있는 나무들에게서 작은 변화를 찾아내며 걷는 것은 매일 같은 길을 걷는 산책자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나무 한 그루는 있게 마련이니까.
나는 반복적으로 걷는 산책길에서 좋아하는 나무 몇 그루를 마음에 정해둔다. 새로운 길을 발견하면 그곳에서도 그런다. 그 나무들에게서 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날씨에 따라 나무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지, 한두 해가 지나면 얼마만큼 자라는지... 그러다 보면 언젠가 어떤 날 내가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닌 나무가 나를 본다는 착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게 여러 해 관찰한 나무가 생겨나면 그 나무만 보며 걸어도 심심하지 않다. 자주 보았던 나무가 폭풍이나 가뭄을 겪고 난 후엔 마치 사람이 몸살을 앓고 난 모습처럼 보인다.
특히 폭풍이 지난 후 나무들은 부러지고 이파리를 떨구고 잔가지가 뒤엉키기도 한다. 그렇게 초췌해진 나무가 서서히 회복해 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산책의 또 다른 묘미다. 그러니 폭퐁우가 지난 후 걷는 산책길은 안타까우면서도 늘 새로울 수밖에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나무의 기울어짐이나 잎이 죽는 모습을 보고 나무가 서 있는 땅에 변화가 생겼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울어진 나무라도 오염된 땅이 아니라면 신기하게도 아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일으켜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제자리를 찾기도 한다. 그런 걸 보면 나무는 한 자리에 있다고 결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걸 다시금 알게 한다. 어떤 나무는 기울어진 채 계속 성장을 이어가기도 한다. 기울어진 나무가 이웃한 나무들과 어떤 모습으로 생을 이어가는지 오랜 시간을 두고 보는 것도 흥미롭다. 나무는 새와 동물들에게 어떤 이웃인지, 노을이 내리는 저녁의 나무는 어떤 모습인지, 동이 틀 때 나무의 어떤 가지 사이로 햇살이 드는지, 안개 자욱한 날 어떤 나무가 근사한지... 아무리 열거해도 나무의 매력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산책로 호수에 10년째 고목을 자주 관찰하는데 그 죽은 나무는 어떤 말을 할까. 몇 년 동안 그 나무를 보다 보면 호수에 깃들어 사는 생명체에게 활기를 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썩은 고목이란 걸 알 수 있다. 살아있는 나무는 살아있어 그 자체로 생명력을 뿜어내지만 죽은 나무는 다른 생명을 불러 나무의 끝나지 않은 생명력을 드러낸다. 새들의 쉼터가 됨은 물론, 벌레들을 키워 먹이처가 된다. 그러다 여러 해 비바람에 가지 하나 부러뜨리고 점점 더 왜소해지는 것이다. 그 작아짐은 또 스러짐으로 계속 자신의 역할을 이어간다. 그런 고목 하나를 꾸준히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사색은 시작된다.
허리에 강아지 목줄을 묶고 두 팔을 내저으며 당당하게 걷는 아주머니, 바짓단을 무릎까지 올리고 맨발 산책을 하는 아저씨로부터 물이 오른 봄을 느낀다. 그렇게 계절의 변화는 자연에 앞서 사람들의 걷는 폼새, 목소리, 옷, 표정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사람도 결국 자연의 일부이자 가장 스펙터클하게 변화하는 존재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린 모두 언젠가 자연으로 돌아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