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산책길 작은 숲의 터줏대감은 당연히 까치다. 시골이든 도시든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까치.
아침이면 까치는 농구장 귀퉁이에서 흩어진 과자 부스러기를 찾아 먹느라 친구들을 부르는 것인지 더욱 요란하게 깍깍거린다. 그러니 까치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 동네 일등 자명종이다. 설명할 순 없지만 까치의 울음은 아침과 저녁이 다르다는 걸 아침 저녁으로 걷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어느 날 산책길에 집 짓는 까치를 관찰한 적이 있다.
까치는 제 몸보다 기다란 나뭇가지를 입에 물고 나뭇가지 사이사이를 날아오르며 집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은사시나무 아래 벤치에 작정하고 앉아 까치의 집 짓기를 관찰했다. 까치는 나뭇가지를 부리에 물고는 나뭇가지 사이를 나선형으로 날아오르는데 중간중간에 나무에 멈추면서 천천히 날아올랐다. 짓고있던 제 집에 도착하면 부리에 물었던 나뭇가지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렇게 매번 최선을 다해 날아올랐지만 집에 도착해서 나뭇가지를 내려놓는 순간 애써 올린 나뭇가지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러자 까치는 땅으로 내려와 그 나뭇가지를 찾으려는 듯 주변을 이리저리 탐색했다. 그러다가 찾기를 포기했는지 시야에서 사라졌던 까치가 잠시 후 비슷하게 생긴 나뭇가지를 물고 나타나서는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나뭇가지를 옮겨가며 짓고 있는 집이 있는 나무 맨 꼭대기로 날아올랐다. 나무의 맨 꼭대기에 오른 까치는 나뭇가지 올려놓기를 반복했는데 또 몇 번은 떨어뜨리기도 했다.
나는 그날 까치의 집 짓는 모습을 처음 보았는데 원래 까치는 그렇게 실수가 잦은 걸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니면 그 까치가 어리석은 까치인가, 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얼마 후 어떤 인터넷 기사를 읽다가 '재밍'이 일어나지 않는 초반엔 까치집을 지을 때 원래 그렇게 고생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정도 기초가 튼튼해지면 쉽게 둥지를 쌓는다고 한다. 그러니 그때 그 까치는 집을 짓는 초반이어서 다 물어간 나뭇가지를 둥지에 놓을 때 자꾸 떨어뜨렸던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까치는 집을 지어본 경험이 없어도 나뭇가지를 많이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전봇대나 신호등에도 집을 짓기에 까치는 처음부터 집 잘 짓는 집짓기 선수같아 보였지만 사실 까치도 실수를 반복하며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한 번은 산책로에서 까치집이 통째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이 사실을 알고부터는 숙련되지 않은 까치가 짓다 만 집일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까치의 집짓기는 우리들의 삶과도 닮았다. 까치의 집짓기처럼 우리도 어떤 일을 할 때 미숙련 상태에서는 실수를 연발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숙련이 되면 실수가 줄어든다. 새들마다 집짓기의 재료를 자신의 몸에 맞게 다르게 선택하듯, 우리 삶을 이루는 재료 선택도 그러하다. 또, 까치의 집짓기에서 둥지까지 오를 때 쉬어가는 타이밍이 까치마다 다르듯 우리의 '쉼'도 같을 수 없다. 까치는 긴 장대를 물고 날 때는 절대 한 번에 날아오르지 않는다. 더 자주 쉬며 계단을 밟고 오르듯이 나선형으로 차근차근 날아오른다. 또, 한참 집을 짓고는 제법 긴 휴식 시간도 갖는다. 떨어뜨린 나뭇가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자주, 많이 쉬더라도 집이 집으로써의 역할을 하도록 자신만의 방식으로 집짓기를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관계의 둥지 또한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 또한 까치의 집짓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다른 개체가 얽혀 수없이 많은 일을 겪지만 결국 하나하나 헤쳐나갔던 노력들이 단단한 재료가 되어 신뢰라는 둥지를 부서지지 않게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좋은 관계는 허세와 과시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 어울리는 재료를 사용해야 한다. 함께 만들어가는 둥지라서 그렇다. 큰 나뭇가지로만 만든 새집은 엉성하고 쉽게 무너질 것이다. 촘촘하고 튼튼한 둥지는 작은 노력을 더 많이 반복해야 얻어진다.
바위의 갈라진 틈새 속에 손이나 발, 다리 또는 몸을 집어넣고 비트는 힘에 의해 강한 지지력을 얻는 암벽등반 기술을 재밍이라 하는데, 넣는 방향과 힘의 방향에 따라 효과가 다르다고 한다. 그리하여 재밍에 정통하려면 바위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한다. 인간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아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려면 관찰하는 것부터 키워야할 것이다. 그 속에 들어갔을 때 서로가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재밍처럼 말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온화한 아침 바람이 콧속으로 스며든다. 촉촉한 낙엽을 사뿐사뿐 밟으며 걷는 발걸음은 힘차고 낙엽의 사그락사그락 소리는 마음을 다독여준다. 이 느낌은 아직 초록이 보이지 않는 봄의 목전인 겨울이 끝나는 지점에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느낌이다. 곧 봄이 올 거라고, 겨울의 스산함은 이제 곧 끝이니 조금만 힘을 내자고, 저 낙엽 아래에 숨 쉬는 생명들의 아우성이 들리지 않느냐고... 나는 내게 기운을 내자고 주문을 외며 걷는다. 보이지 않아도 자주 걷던 길은 어느 계절에서든 모든 계절을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언제나 보이는 것보다 크다는 건 걷던 곳을 반복해 걸으면 알게 된다.
까마귀 한 마리가 나무 사이사이를 곡예하듯이 날아가며 공중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멀리 점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무 사이로 걸어간다. 걸어가는 한 사람은 까치 백 마리보다, 청설모 열 마리보다도 존재의 밀도가 크게 느껴진다. 사람의 입장에서 본 사람은 무생물에게까지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이기에 그 어떤 동물보다 인간이 아름다운 존재라는 건 명제다. 나는 자연에서 걷는 것이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걸는 사람은 자연의 일부이자 아름다운 사람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