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란 것은 짧은 시간에 가시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무서운 손님이기에 사람을 잠깐이나마 겸손하게도 두렵게도 만드는 것 같다.
태풍 카눈이 오는 바람에 출발 전 예정했던 선재길 탐방로는 출입이 불가할 것 같아 우리는 가벼운 차림으로 상원사로 향했다. 숙소에서 상원사로 가는 길은 비포장 길로 십여 킬로미터 가야 하는데 가면서 내내 이 길을 자동차로 간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완벽한 푸르름과 촉촉한 흙길을 차로 간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상원사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관리사무소 직원으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있었다. 비가 멎었고 태풍이 지나갔는데 왜 못 들어가게 하냐며 아쉬움 반 불만 반으로 관리사무소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원래 태풍이 지나간 후엔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등산로 안전 점검을 위해 다음날까지 입산 통제는 기본이라 한다. 우리야 예측을 했었고 원칙을 따르는 사람이기에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사회 곳곳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일로 항의를 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땅히 지켜야할 규정에서 어긋난 항의는 담당자에게 얼마나 당혹감을 주는 것인지 모르는 바 아니기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우리에게도 마음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여행이란 것이 얼마든지 다른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게 묘미 아닌가. 게다가 이곳은 계획했던 곳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자연이 넘쳐나는 곳, 오대산에서 선재길을 걷지 못한다고 비로봉에 못 오른다고 아쉬워할 이유가 없다. 전나무 숲길을 다시 걸어도 좋고 그 어디를 가든 숲길 천지니 말이다.
나고 자란 곳이 지척인 오랜 고향 친구가 그 모습을 보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다 틀려먹었어 "
친구가 한 농담의 말과 뜻을 알기에 나는 바로 알아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만에 들은 말인지 나는 한참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에게 있어 그 말은 얼마나 반갑고 웃픈지 모른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말을 친구 또한 아버지로부터 듣고 자란 것이다.
'다 틀려먹었어'라는 말은 우리가 자란 시골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흔히 들었던 말이다.
아버지는 뭔가 억울하게 안 될 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다 틀려먹었어' 하는 말을 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했던 '다 틀려먹었어'라는 말은 주로 이럴 때다.
어느 핸가 군납할 양배추 농사를 지었는데 몇 날 며칠 비가 내려 다 자란 양배추가 물러져 밭을 갈아엎어야 했을 때, 한파로 감자 창고의 감자가 얼어 군납할 양이 부족했을 때, 애써 키운 벌이 어느 핸가 떼죽음을 당했을 때 등이다.
'다 틀려먹었어'라는 말은 자포자기의 말이지만 아버지에게 있어 뒤따르는 행동은 포기가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손해를 덜 보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내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가 받아들여야한다는 걸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옆사람에게 자신이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걸 천명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머뭇거리지 않게 지켜봐라. 그런 의미에 가까운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아버지들은 가난한 삶에서 수없이 좌절감을 겪었기에 언제나 최악의 말을 해두어야 다음에 어떤 안 좋은 상황이 벌어져도 덜 낙담하려고 했던 말이 아니었을까. 최악의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찾고자 했던 그 시절 그 고장 가난한 아버지들의 간절한 희망의 말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 틀려먹었어'라는 말이야말로 친구의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생을 그대로 대변하는 가장 적확한 말이 아니던가. 가난에서 희망보다 절망을, 배부름보다 배고픔을, 기쁨보다 슬픔을 먼저 알아버린 그 시절 아버지들의 삶을 상징하는 말 같아 하루 종일 그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웃에게 전화를 돌려 양배추가 무르기 전 따가서 먹으라는 말,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돈을 더 주고 알이 굵은 감자를 경운기에 실어 오던 일...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의 말을 일삼았지만 다시 일어나는 사람이었다.
그 시절 아버지가 했던 말들은 우리들에게 모진 말이 많아서 자주 상처받고 좌절하고 무기력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다 틀려먹었어'라는 말은 아버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가슴 한 언저리가 아릿해왔다.
"그러니? 우리 아버지도 그랬어"
"맞아. 다 글렀어, 이 말을 그렇게 했던 것 같아"
우리는 이후 상원사를 오를 때 우산을 차에 두고 내렸는데 비가 내리자 '다 틀려먹었어'
절 단청에 앉은 까마귀와 사진을 찍으려다가 까마귀가 홀딱 날아가도 '다 틀려먹었어'
돌담에서 나온 다람쥐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구멍으로 다람쥐가 쏙 들어가도 '다 틀려먹었어'를 연발하며 그때마다 배꼽을 잡고 웃었다. 우리의 아버지는 다르지만 '다 틀려먹었어'라는 공통의 언어를 우리에게 남기고 가 우리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것 같았다. 우리만 공유할 수 있는 말장난 유머, 우리는 그걸 공유했다는 것에 즐거움이 벅차올랐다.
그 시절 상스럽고 고약한 말들 중 그래도 순화된 말이었던 '다 틀려먹었어'라는 아버지의 말이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아버지의 삶을 조금 더듬어보게 되자 이해가 되었다. '다 틀려먹었어'라는 말은 태어나 보니 자신의 삶이 다 틀려먹었다 생각했던 나의 아버지나 친구의 아버지를 살게 했던 희망의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했던 모진 말들이 상처를 주는 줄도 모르고 가족에게 해대며 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들. 시작부터 어그러진 삶을 끝내 하늘마저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한 자조적 표현이 아니었는지. 친구의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도 모진 새어머니 밑에서 산 그 외로운 생은 처음부터 그렇게 다 틀려먹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우리는 적멸보궁을 1킬로 남기고 굵어지는 빗방울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상원사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머릿속에 맴돌던 아버지의 말들을 낙숫물에 흘려 보냈다.
내가 만약 아버지와 이 다원에 왔다면 아버지는 지금 또 무슨 말을 했을까. 비가 오는데 이런 데 왔냐고 핀잔이나 주었을까, 할 일 없이 이런 데서 무슨 차냐는 소리를 했을까, 생각하니 또 가슴 한 켠이 아릿해졌다. 상원사 경내로 들어가는 높은 계단이 보이는 다원에서 우리는 비슷한 아버지를 둔 덕에 비감에 젖어 비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없이 한참을 앉아있었다. 계단 끝에 피어 하늘과 맞닿은 주홍 나리, 연둣빛 목수국 그리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산사를 촉촉한 고요로 덮고도 남아 우리의 마음마저 노긋하게 덮어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산사의 풍경은 이런 곳에서 아버지에게 따뜻한 대추차 한 잔 마주해보지 못한 우리를 위로해 주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