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카눈으로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북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태풍이 오지 않았다면 아침 일찍 선재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루 전 숙소 식당 수피다에서 해탈(‘옴뷔’의 고양이 이름)이에게 추루를 주던 지도 스님이 여러 권의 마음치유책을 추천해 주셨지만 우리는 결국 읽고 싶은 책을 선택했다. 사진보다 더 사진처럼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는 그림책을, 비 오는 날엔 시집이 어울린다 생각한 나는 시집 한 권 골라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부는 비바람과 키 작은 나무들의 흔들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평온해져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창문에 부딪는 빗방울을 보며 차를 마시고 책을 보는 몇 시간이 간절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몇 시간을 말없이 풍경과 책과 자신에게 빠져들었다.
그날부터 다음날까지 아침 저녁 식사 후엔 매번 주변을 산책했다. 길러지지 않아 자연 정원이 되고 만 '붓다의 정원'과 개천가 소나무길과 전나무길을 산책했다.
오대산 명상마을 정원에는 매듭풀과 금방동사니라는 풀들이 마치 부러 씨앗을 뿌려놓은 것처럼 정원을 가득 메우며 자라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오랍뜰에서 흔히 보던 풀들이다. 특히 고추밭이고 감자밭에서 뽑아내던 그런 풀들이 이곳에선 마치 정원의 주인공인양 싱그럽게 퍼져 자라고 있는 것이다. 특히 매듭풀에 유리구슬처럼 쏟아진 빗방울은 탁한 눈마저 맑게 만들 만큼 영롱해서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친구는 산책할 때마다 쪼그려 앉아 매듭풀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한쪽 가지가 잘린 아카시나무와 외따로 쭉 뻗은 소나무를 담았고, 매듭풀을 찍는 친구와 달맞이꽃도 사진으로 담았다. 내가 찍은 가장 아름다운 사진은 빗방울에 푹 빠져 엉덩이가 젖는 줄도 모르고 사진을 찍는 친구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오대산 명상마을에서 월정사로 향하는 오솔길엔 밤새 몰아친 태풍으로 몇 백 년은 됐음직한 전나무 몇 그루가 수북이 가지를 떨어트려 놓았다. 가지가 많이 떨어진 곳의 위를 쳐다보면 필연 잎이 없는 죽은 나무거나 죽어가는 나무다. 거센 바람에 속수무책 떨어진 가지들이 우리 인생도 휘몰아치듯 힘든 시기엔 욕심이든 욕망이든 가지를 쳐 떨어뜨리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것을 나무들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고목 아래를 지나는 것만으로 왠지 숙연해졌다. 그렇게 계곡을 따라 걷는 월정사 전나무숲길에서 쓰러져 등걸만 남은 600년 수령의 나무를 만났다. 옆으로 차근차근 뻗으며 곧게 성장하는 전나무는 아래부터 가지를 부러뜨리며 성장하다가 제 몸뚱이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시련을 만나면 마침내 몸뚱이를 눕힐 것이다. 그러고도 전나무는 쓰러진 채로 또 수십 년을 작은 생명들의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장성한 자녀들과 함께 걷던 5인 가족을 만났는데 그들이 사진을 부탁해서 찍어주었다. 전나무는 5인 가족인 삼대를 오롯이 품어주고 남을 정도의 아름드리 등걸이었다. 모두 다른 시간에서 와 다른 시간에 떠날 가족이겠지만 그 찰나의 시간에 다 함께 활짝 웃는 모습은 이 울퉁불퉁한 고목과 함께 근사한 사진 한 장으로 기억되리라. 그중 누구든 생의 말미에 그 전나무속에서 웃었던 찰나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이들이 저들만큼 성장하면 이 가족들처럼 이곳에 와서 저 나무 등걸 안에서 가족사진을 찍으리라, 아니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의 말과 몸짓을 놓치지 않고 마음에 담으리라,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
오대산 명상 마을 숙소
태풍 때문에 숲길을 걷느라 가보지 못한 성보박물관 앞에는 연못과 정자를 둔 정원이 있다. 다리와 버드나무가 있는 풍경이 마치 모네의 정원 연못을 연상케 한다. 연못에는 연과 수련이 있고 물가로는 보랏빛 부처손과 물풀이 자라고 있다. 박물관 앞으로는 산토끼들도 몇 마리 뛰어 다닌다. 여름부터 초가을에 피는 마타리꽃이 마침 탐스러이 피어있었다. 마타리는 주로 산지에 자라는 겨자색에 가까운 꽃이다. 멀리서 보면 개나리나 유채꽃으로 착각할 만큼 비슷한 색이지만 마타리는 그보다 깊은 색을 띤다. 어른 키를 훌쩍 넘을 만큼 크게 자란 마타리가 빗방울을 얹고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마타리의 아련한 흔들림에 빠져 한참을 그곳에 머물렀다.
마타리꽃
태풍은 계획했던 여행 일정을 변수로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덕에 숙소 주변을 산책할 수 있었다. 여행은 목적한 곳을 향해 출발하지만 그곳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뜻밖의 풍경들로 예상하지 못한 즐거움과 행복감을 선물해준다. 화려하지 않은 곳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 감동은 배가된다. 내게 있어 그곳이 어디든 자연이 있는 곳은 다 그렇다. 태풍으로 인해 가려던 곳을 가지 못하고 숙소 주변 산책을 하며 보고 느꼈던 풍경들이 한동안 마음에 그림처럼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