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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어떻게 삶을 사랑하게 하나?

죽어서 다시 사는 나무

by 붉나무

걷다 보면 의도치 않게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자주 걷는 호수에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중 한 가지다.


나는 비가 오면 그치길 기다렸다가 걷는 버릇이 있다. 비 온 후 느껴지는 풀과 물 냄새, 새들의 지저귐, 투명한 공기를 좋아한다. 비 온 후 풍경은 깊이를 더해 걷기의 기쁨을 배가시킨다. 자연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은 나서는 자에게 선물로 온다.

비는 낯익은 장소를 낯설게 만드는 만든다. 우중 산책도 색다른 즐거움을 주지만 여름 비는 낙뢰와 천둥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기에 보통은 비가 그친 후 걷는다. 특히 여름 비가 온 후엔 자연은 다채롭게 변하기에 발견의 즐거움을 느끼기에 더없이 좋다. 풀과 나무는 비가 주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오롯이 받아들인다. 자연의 받아들임, 그런 것을 관찰하며 걷는다. 특히 비 온 후 걸을 때, 나를 잊음과 동시에 내가 가장 생생히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곤 하는데 비 갠 후, 맑은 하늘 사이로 하얀 구름이 드러날 때 그것 자체로 벅차오를 때가 있다. 노력 없이 얻는 행복감이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죽을 뻔한 몇 번의 사고, 죽다가 살아난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 세대는 오십까지 살며 죽을 만큼의 고통을 넘지 않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살아있음에도 내가 살아있음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아니 살아남았다는 것.


파주로 이사를 온 후 유비파크라는 호수를 나는 몇 번쯤 갔을까, 십 년 이상을 살았으니 천 번은 갔을 것이다. 그때부터 봤던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다. 아름드리 나무로 물속에 나무 밑동이 잠기게 된 나무다. 내가 이 나무를 발견한 때는 이미 몸통의 절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무의 단면으로 보아 인위적 절단은 아닌 낙뢰나 태풍으로 부러진 나무로 보였다. 그 나무는 울퉁불퉁함 그 자체로 봄이면 언제나 곁가지에 새잎을 돋아내 버드나무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최근 2~3년 사이 완전히 죽어 등걸만 남았다. 등걸의 쓸모는 새들의 쉼터, 벌레들의 먹이 창고라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청설모의 집(?)이란 걸 알게 되었다. 청설모가 나무 타기 선수인 건 익히 알았지만 이토록 용감한지 몰랐다. 5~6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나무에서 단숨에 버드나무 둥치로 점프를 해서는 순식간에 썩은 나무 등걸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잠시 후 수면으로 나무껍질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나무 가운데 뚫린 구멍에서 동그랗게 말린 청설모의 꼬리가 서서히 펼쳐지며 드러났다. 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머리와 몸통이 한참 보이지 않다가 꼬리가 보이던 자리에서 청설모의 까만 주둥이가 빼꼼 드러났다. 그 찰나, 나무 등걸 아래 호수의 수면을 가로질러 새끼 오리가 헤엄쳐 가고 멀리서 또 한 마리가 헤엄쳐오고 있었다. 청설모는 고개를 내밀어 사방을 살폈고, 나는 그 모습이 흥미로워 연신 사진을 찍었다. 나는 청설모의 다음 행동이 무척 궁금해 한참을 데크에 서서 그 광경을 관찰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당시 찍은 영상과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결국 펜으로 그림까지 그리게 되었다. 이후, 나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무 등걸을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나무 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푸른 잎사귀를 발견했고 그곳을 산책할 때마다 나무 등걸을 보게 되었다. 그 식물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났고 나는 그 후 그 나무 등걸이 다시 살아난 나무로 느껴졌다.

파주에 정착하고 십 년이 넘는 시간은 처음 본 키 작은 메타세쿼이아가 두 배로 자라나는 시간이었고, 오랜 시간 이 호숫가에 살았을 버드나무는 썩어서 점점 제 키를 줄이는 시간이었다. 소멸해 가는 나무들이 무심히 호수에 깃들어 사는 생명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음을 보며 자연의 순환과 공생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 광경은 진한 감동이 되어 내 마음에 남았다.


나는 이 호수 둘레를 계절과 낮밤을 가리지 않고 걸었다. 그 시간만큼 나는 이 호수를 애정하게 되었다. 작은 생명들의 안식처가 되는 이 썩은 버드나무 등걸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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