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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은 어떻게 삶을 사랑하게 하나?

내가 새 사람이 된 줄 착각한다

by 붉나무

비 온 후 3월 말의 산책로는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야단이다. 매화나무에서 시작된 봄꽃 향연은 생강나무,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꽃으로 이어진다. 봄에 걷는 것은 행복 그 자체다. 꽃이 있는 길을 걸으며 그 이상의 풍경을 바란다면 욕심이라 생각한다. 여름엔 풀을 밟아도, 뽑아 버려도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는데 봄에는 풀 한 포기 밟으면 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꽤 긴 시간 회색빛 도시에 푸른빛 생명으로 선물을 주었으니 아무리 작은 풀 한 포기라도 귀한 것이리라. 보도블록 틈에 올라오는 개별꽃, 주차장 모서리에 피는 제비꽃은 어떤가. 한껏 허리를 숙여야 생김새를 제대로 볼 수 있다. 앞만 보고 걸으면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3월은 안팎으로 바쁜 시간임에도 걸을 생각으로 퇴근 무렵이면 발바닥이 근질근질하다. 하늘마저 새파란 날엔 일거리를 들고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꼼짝없이 실내에 갇혀 일하는 내게 3월은 자꾸 인내심을 시험한다. 이런 마음으로 나선 발걸음이니 바깥의 그 어떤 것인들 좋지 않으랴.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발견한 웅덩이, 하늘이 파랗다. 웅덩이에 비친 하늘이 파랗다면 실제 하늘은 얼마나 더 파랗단 말인가. 아껴보고 싶어 웅덩이를 더 들여다보고 있는데 하얀 조각구름 하나 들어온다.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봄날 하늘이 가을 하늘처럼 깨끗할 때 더 기분이 좋은 건 봄은 으레 뿌연 날이 많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문득 마주한 풍경엔 더욱 감탄하는 게 인지상정이니까. 사람의 마음을 순식간에 우울에서 화창한 기분으로 전환하는데 계절과 날씨가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다니... 정말 자연은 위대한 치유자인 게 맞다.

나는 산책 일기를 쓸 때 집 밖을 나서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순서대로 적거나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기록한다. 무언가를 남기려는 것보다 매일 같은 곳을 걸어도 늘 새로운 장면을 보게 되고 느끼게 되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긴다. 그리하여 가감 없이 그대로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예기치 못한 장면을 마주하거나 보게 된 것을 보통 시간 순서로 나열하다 보면 그 기록 과정에서 보지 못했던 것을 기록하며 다시 보게 되기도 하고 몰랐던 것을 찾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오늘도 그랬다. 사실 감흥이 덜한 날도 있지만, 내 몸 자체가 움직였으니 그걸로 충분하기에 걷고 나서 후회하는 일은 단연코 없다.

고양이와 괴물 얼굴 같은 나무 단면

공원에 들어서자 봄을 만끽하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공원길에 나무 한 그루 있는 너른 잔디밭이 있는데 그곳은 개를 키우는 몇몇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다. 이곳은 내가 개를 키우기 전부터 목줄을 풀고 강아지를 뛰어놀게 하는 사람을 자주 볼 수 있던 곳이다. 나도 개를 키우기 전엔 그런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내가 반려견을 들이게 되면서부터는 마음속으로 '그럴 수도 있지' 한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얼른 자신의 개를 부르겠지' 한다. 분명 관리 영역을 벗어나 제 맘대로 뛰어다니는 개들이 있을 텐데도 내 마음속에선 자꾸 '그럴 수 있지'하며 반려인의 입장에 서려한다. 공원에서 목줄을 풀면 안 된다는 걸 이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규칙에 어긋난 그런 행동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되는 걸까. 그건 개가 늘 목줄에 매여 사람들에게 활동 범위가 구속되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자유로이 놀게 하고 싶으면 저럴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노라면 지인 중에 개를 위해 살던 아파트를 처분하고 마당 있는 주택으로 이사를 갔다는 사람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다.

공원을 벗어나 좁은 산길에 들어서자 마주 오던 사람이 내가 개의 목줄을 1m로 당겨 잡았는데도 길이 아닌 낙엽 더미가 쌓인 곳으로 에둘러 간다. 내가 개를 키우기 전에 산길에서 개와 마주쳤을 때 취하던 행동이다. 그런데, 그분이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미안한 마음과 함께 뭔가 내 기분도 살짝 좋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목줄을 더 이상 얼마나 짧게 잡아야 저분은 안심하고 제길로 가는 사람인가, 나는 개를 길이 아닌 쪽으로 충분히 보내고 그분이 걸어갈 넓이의 길을 내주었음에도 그와는 상관없이 그분은 길이 아닌 곳으로 둘러 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내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몇 발자국 더 걷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그분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나도 개를 키우기 전엔 견주가 아무리 목줄을 짧게 잡아도 개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다 보니 목줄의 길고 짧음과 상관없이 반사적으로 그 사람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분도 개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이 있을지 모른다. 또 내가 편히 지나가라고 양보해 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상황에서 내가 기분 상할 일이 아니다. 그냥 나는 나대로 기준을 지켰으니 됐고, 그분은 그분대로 그렇게 지나갔으면 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조심을 해도 개를 키우지 않는 사람에겐 개를 키우는 사람의 행동과 생각이 전부 이해될 리 만무하다. 이해시키려 애쓸 필요도 없다.

어려서 개에게 크게 물려 몸에 큼지막한 상처가 있다. 그리하여 개라면 늘 경계했던 내가 개를 입양해 개와 산책하며 개와 함께 자며 이런 생각을 하고 개에 대한 글까지 쓰다니... 사실 아직도 개를 키우는 내가 간혹 낯설다. 아직은 어쩌다 닥친 상황이니 책임감으로 함께 사는 정도가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모든 상황과 생각과 태도는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우린 모두 분명 생각지도 않던 상황을 마주하며 살게 되고 또 그것에 적응해 나간다. 그러니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느니, 손가락을 자른다느니, 그런 극단적인 말들을 삼가야 할 것 같다. 아니 '극단적 선택'이라든가 하는 그런 말 자체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를 싫어했지만 키울 수밖에 없게 된 운명이란 것이 있는 것이다. 모든 상황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에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개와 함께 살게 되면서 개와 산책하게 되면서 더 배우는 요즘이다.


오늘은 공원길을 걸으며 쓰러진 통나무에 그림처럼 앉아있는 얼룩 고양이, 고여있는 물에서 물을 찍어 마시는 산비둘기, 아직은 잎이 없는 참나무에 무수히 날아든 저녁 까치의 낯선 울음, 잣나무 앞에 피었기에 앙상한 가지의 여린 꽃조차 도드라져 보이는 매실나무꽃, 버드나무의 투명한 연둣빛, 잘린 통나무에서 발견한 괴물 얼굴, 지난해 맺은 까만 열매가 아직도 통통한데 연둣빛 이파리를 밀어 올리는 쥐똥나무.... 이런 나무들에게서 계절의 변화를 실감했다. 이런 걸 보며 걸을 땐 내가 나이가 든다기보다 나도 봄처럼 어려지고 새 사람이 되는 것 같다. 이런 착각은 늘 길 위에서 일어나는데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착각이다.


3월 3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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