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과 그림은 모두 산책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집안에만 있었다면 쓸 수 없는 글이다. 이 글은 산책으로부터 나온 글이지만 산책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그럼에도 산책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산책을 하면서 나를 좀 더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까지 발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덤으로 관심조차 없었던 주변의 작은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들로부터 내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양육자가 그러하듯 평일 아이들을 양육하며 내 시간을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는 이른 아침에, 중고등학생이 되고는 학원에 갔을 때 집 앞 산책길을 걷는 것부터 산책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매번 같은 길만 걷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도 그 길이 똑같다 생각한 적은 없었다. 풍경은 날씨와 시간, 감정 상태에 따라 달리 보이며 시시각각 소멸과 변화의 과정을 겪기 때문이겠다.
내가 기록하는 산책 일기는 육아나 바쁜 직장인으로 사느라 시간과 활동영역을 자유로이 넓힐 수 없는 사람, 주변에 걷는 길이 늘 단조롭다 생각되는 사람, 또는 혼자 심심하지 않게 걷는 법을 궁금해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힌트가 되면 좋겠다.
2월의 파주는 춥다. 오늘은 황룡산 숲길을 간다. 한낮인데도 바람이 세차게 불어 체감 온도가 영하 10도는 되는 것 같다. 겨울바람은 옷을 단단히 입게도 하지만 막상 꽁꽁 싸매고 나가면 후회하는 일도 많다. 오랜 기간 걸어본 경험에 의하면 도시 주변 산책 시 추위를 참지 못할 만큼 추운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겨울바람은 건강약자에게는 조심해야겠지만 건강한 사람에겐 흐릿한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묘약이 되기도 한다.
황룡산은 산길에 들어서기 전 농원이 있다. 농원 입구에 벌목한 통나무가 사람 키보다 높이 쌓여있다. 나는 잘린 나무의 단면을 보면 관찰하길 좋아하는데 오늘은 나무에서 파마머리를 한 코가 오뚝하고 턱이 갸름한 사람의 얼굴을 발견했다. 마치 누군가 조각도를 사용해 조각한 것처럼 선명하다. 만약 내가 이 나무의 주인이라면 근사한 야외탁자로 사용하거나 액자처럼 벽에 걸어둘 것이다.
산책을 하며 나무의 단면을 관찰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무척 울적했던 몇 년 전 어느 날 산책길에,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사람의 얼굴 표정을 보고 순식간에 기분이 나아진 적이 있다.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소나무는 아침 이슬에 젖어 짙은 소나무 향이 났다. 그날 보았던 소나무 단면의 표정은 깜짝 놀란 사람의 얼굴 표정과 흡사했는데 마치 나에게 뭘 그리 시무룩하냐며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 산책길에 특이한 걸 발견하면 가족 밴드에 올려 아이에게 보여주기도 하고 그림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내게 있어 그런 과정 자체가 조용한 단톡방에 활력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 자체로 즐거운 놀이도 되기 때문이다.
시멘트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인 산길 입구에서 낙엽 한 장이 바람에 날려 톡톡톡 내 발 앞까지 날아온다. 낙엽이 발이 달린 것은 아니지만 점프를 하듯 날아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밌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면 마치 거미가 멈췄다가 다가오다가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 마루로 올라왔던 거미가 그렇게 멈추다 다가오다를 반복했는데 그 순간 낙엽 한 장이 어린 시절 툇마루에서 보았던 거미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바람이 멈추면 낙엽도 멈추는데 선명한 그림자가 애니메이션의 유령처럼도 보인다. 수많은 낙엽 더미의 낙엽은 자세히 보지 않지만 낙엽이 한 개 따로 있을 땐 시선이 간다. 그런 나뭇잎이 햇살을 받으면 선명한 그림자를 만드는데 그런 것들은 상상력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나는 그런 하찮은 것에 상상력을 발동하거나 내가 아는 그 무엇과 닮은 점을 찾아보기도 한다. 이 낙엽은 시멘트 위에서 밟힐까 아님 땅으로 날아가 흙이 될까를 생각해보기도 한다. 낙엽 한 장도 따로 보면 같은 잎이 없다. 그 소멸마저도.
숲길에 들어서자마자 새소리가 요란하다. 내가 아는 직박구리 외에 한두 종의 새소리가 더 들린다. 가까이 다가가 보기로 한다. 잡목이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제법 큰 나무가 마주 보고 있는데 대여섯 마리의 새들이 두 그루의 나무를 오가며 요란하게 지저귄다. 직박구리, 박새, 멧비둘기로 파악되었다. 길에서 숲으로 조금 더 들어가 새들을 관찰하기로 한다. 산새들은 보통 사람이 가까이 가면 나뭇가지 높이 날아가 앉거나 멀리 날아가버리기 마련인데 이 새들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멀리 가지 않고 잠깐 다른 나무에 앉았다가 다시 큰 나무에 앉았다. 그 이유가 궁금해 더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기로 한다. 아... 자세히 보니 나무에 누런 덩어리가 매달려 있다. 새들이 그 덩어리를 쪼아 먹느라 날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정체불명의 노란 덩어리는 뭘까, 나는 또 궁금해서 덩어리를 만져보기로 한다. 누군가 곡물 덩어리를 뭉쳐 꽁꽁 얼려서 나무에 매달아 둔 것이다. 밥알 등 여러 곡식이 섞인 것 같았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새들에게 모이를 뿌려주는 것은 보았어도 밥덩이를 얼려 매달아 둔 것은 처음 보았다. 그런데 그 밥덩이를 쪼아 먹는 직박구리 한 마리는 내가 가까이 가도 절대 날아가지 않고 끊임없이 쪼아 먹기를 반복했다. 다른 직박구리들은 한 번 먹고 날아가고 다시 와서 한번 쪼아 먹고 내가 다가가면 날아가곤 했는데 딱 한 마리만 시종일관 밥덩이 옆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배가 고프거나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거나... 암튼 새들도 종에 따라 예민함이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박새는 직박구리에 비해 좀 더 예민한 것 같았다. 몸이 재빠르고 내가 다가가면 제일 먼저 날아갔다. 멧비둘기 한 마리는 이미 식사를 마친 건지 밥덩이에 관심이 없는 건지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겨울 숲은 단조롭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볼거리가 화려하지 않기에 오히려 눈이 가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이 생기는 계절이다. 무엇보다 새들을 관찰하기 더없이 좋은 계절인 것 같다. 새들은 앙상한 나무에서 쉽게 발견되고 낙엽이 쌓인 낙엽 속에서 후투둑 튀어나오기도 하고 덤불에서 들썩들썩 움직여 깜짝 놀라게 하기도 한다. 새들은 겨울 숲에 생동감을 주기에 더없이 멋진 생명체다. 새들은 산책을 할 때 지루하지 않게 하는 가장 멋진 산책 기여자다.
오늘은 운정 야당동에서 일산동고등학교 방향으로 걸었다. 이 길 왼편엔 군부대가 있어 철망 울타리가 쳐져있고 오른편엔 무덤들이 드문드문 있는 소나무숲길이다. 몇 년 전에 왔을 때와는 다르게 여러 샛길이 중간중간 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숲길엔 한 해가 다르게 길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이 숲길도 여러 갈래길이 나 있었다. '길이 옆에 있습니다'라고 걸어놓은 현수막이 무색할 정도로 현수막 옆으로도 길은 이어졌다. 이 산은 일산과 파주의 경계에 있어 일산 파주 사람이 걸어서 왕래할 수 있는 산이 되겠다. 돌아오는 길에 소나무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찌나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지 나무들의 뿌리가 내 손등의 정맥들처럼 선명히 드러났고 길들이 봉당처럼 반들반들하다. 드러난 뿌리는 계단이 되어 사람들에게 안전한 길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피곤한 발바닥을 지압하는 용도가 되기도 한다.
나도 언젠가 더 깊은 자연에 살게 되면 식은 밥을 얼려 겨울나무에 매달아 온갖 새들을 불러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