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이한 Mar 24. 2024

꼰대라는 걸 들키기는 싫어서

나보다 10살이 어린 그녀가 옆 자리 동료로 왔다. 


올해는 **년생이 신입으로 왔다는 말은 매년 듣긴 했지만 정확히 10살이 어린 사람이, 게다가 옆 자리 동료로 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나이를 듣고 나는 나와 그녀의 학번이 얼마나 아득한지를 생각했고, 그런 그녀가 나와 놀아주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인 그녀와 30대인 내가 비록 MZ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어도 10년의 세월은 그리 쉽게 좁혀지기 어려우니까.  


20대 후반의 그녀는 의욕도 많고 활달했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생기가 넘쳤고 싱그러웠다. 1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며 동태 눈깔이 된 나와는 에너지부터가 달랐다. 게다가 직장 생활 4년 차라는 그녀는 경력에 비해 이전 직장에서 나름 중요한 업무들을 많이 해보았다고 했다. 야무지고 똑똑한 친구가 왔구나. 내가 뭘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내는 모습에 믿음이 갔다. 


2주 차가 되고, 나는 새로 옮긴 부서 업무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업무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이전 업무 문서를 들여다보며 업무 파악을 하고, 관리자와 예산 편성과 운용에 대해 협상을 하고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하며 그럭저럭 어느 정도 계획안을 정리해두고 있었는데, 옆 자리 그녀는 다른 일에 열중이었다. 분명 이 시기에는 업무 계획안을 작성하며 바빠야 할 시점인데 너무 조용한 것이 이상했지만 내 업무도 아닌 일에 간섭할 수 없어서 잠자코 내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부서에서 먼저 그녀에게 업무 진행 상황에 대해 말을 꺼냈다. 당황한 그녀가 부랴부랴 업무 내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니 업무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순서와 방법에 대해서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들어보니 그녀의 이전 직장은 업무 체계가 명확했지만 이곳은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업무를 파악하고 수행해야 했다. 옆에서 내가 업무 처리에 대해 몇 번 조언을 주었지만 그녀는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처음 직장을 옮겨서 적응하느라 힘들고 어려울 텐데 자기가 맡아보지도 않았던 업무를 이끌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겠다 싶어서 위로도 많이 해주었다. 하지만 그녀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쌓여만 갔다. 


3주 차가 되자 그녀는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 끝에는 입버릇처럼 한숨과 욕이 붙어 있었고 사무실에서 우당탕탕 큰 소리를 내기도 했다. 사무실에 사람들이 없을 때면 이전 직장과 이곳을 비교하며 불만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자신이 이전 직장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해왔는지 토로했다. 처음에는 안쓰러운 마음에 들어주었지만 며칠 동안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니 나도 질려버렸다. 


똑 부러진 줄 알았던 그녀는 알고 보니 빈틈이 많았다. 본인이 익숙한 일에는 능력자였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는 영락없는 초보였다. 먼저 나서서 하겠다고 했던 일은 몇 주일째 밀려 있었고,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가장 늦게 내는 일이 허다했다. 업무를 하다 보면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그녀의 우선순위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여유가 없었다. 


10살 어린 그녀는 10년 전 내 모습과 닮아 있을까.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도 지금의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잘한다는 선배들의 칭찬에 도취되어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현실에 주저앉아 있고 나 혼자 이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 자부하기도 했다. 누가 내 업무에 간섭이라도 하면 내가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당한 것처럼 화를 냈던 적도 있다. 지나고 보니 왜 선배들이 급하게 서둘지 말고 기다려보라고 말했는지 이해가 간다. 


내가 강물이 될 필요는 없다. 
그저 오늘은 거칠게, 내일은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볼 수 있으면 된다. 


직장에서는 모두가 티 나지 않게 자기 몫을 하고 있다. 굳이 티를 낼 필요도 없다. 자기에게 오늘 주어진 몫을 다 소화해 내는 것, 그것은 기본이니까. 내 짧은 경험 속에서 힘들다, 일 많다고 소리 내는 사람 중 대다수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었다. 정말 업무가 과다한 사람은 소리칠 시간조차 없다. 입 다물고 열심히 타자를 두들겨내느라 바쁘기만 하다. 


그녀의 짜증을 받아주다가 오히려 내가 짜증이 나버린 날, 나는 이제 귀를 닫고 싶었다.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이 모두 들으라는 것처럼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고 있는 그녀에게 감정을 소모하기도,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귀찮아졌다. 퇴사하고 싶으면 퇴사해 버리라지. 나는 그저 내 할 일이나 하다가 가면 그만이었다. 내일도 그녀의 무례한 태도가 누그러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상대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굳게 다짐을 했건만, 다음 날 출근해 보니 옆 자리 그녀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이제 바쁘던 업무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모양인지 다른 사람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홧김에 어제 그녀에게 한 마디를 하려다가 만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역시 선배들의 말은 틀린 게 없다. 모든 일은 급하게 서둘지 말고 기다려 보아야 한다. 


휴, 다행이야. 꼰대가 되지 않아서.  


그녀의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아 이것저것 농담을 나누면서 내가 알고 있는 동네 맛집들을 추천해 줬다. 얼마 전에 이 지역으로 이사 온 그녀는 아직 가본 곳이 많이 없었다며 내가 공유한 맛집들을 저장하느라 바빴다. 혼자 타지에 온 그녀를 챙겨주려는 마음에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면 다른 동료들이랑 주말에 같이 등산도 가보자고 했더니 그녀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10살이 어린, 10살이나 어린 그녀가 나와 놀아준다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다. 


그녀에게도 그랬듯이, 나에게도 강물을 보는 마음이 필요했다. 어느 날은 거칠었다가도 어느 날은 평온한 그녀를 강물처럼 바라보아야겠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강물이리라. 꼰대라는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눈은 반쯤 감고 입은 다물고 귀와 지갑은 활짝 열어두어야지. 더 나이가 들면 놀아주지도 않을 그녀들을 위해, 지금 나와 함께하는 그녀들을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그들의 삶과 인터뷰하는 책 3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