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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리에 Mar 26. 2024

선택지는 달라도 도착지는 하나

▶ 에필로그 2015.2 ~ 2024.3 


2015년 음력 설날 2월 19일 내 나이 마흔이 되던 해, 인생 살면서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 버킷 리스트였던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태국으로 여행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팟타이에서 시도했던 스카이다이빙이 오전에 끝나지 않았더라면, 다시 호텔로 돌아와서 스카이다이빙 이후 시간이 남는다며 방콕의 카오산로드 거리에 가지 않았더라면, 오전에 시도했던 스카이다이빙 때문에 피곤한 나머지 다리가 아프다며 카오산 로드의 한 은행 앞에 앉아서 구정 명절의 중국 용선(龍船) 축제를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곳에서 한 프랑스 남자를 만나지 않았었을텐데… 그리고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현재 나는 프랑스에 살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 책의 탄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프랑스, 그리고 프랑스어와의 인연은 한 남자와의 우연같은 필연적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15년 구정 설날 오전, 나는 한 마리의 새처럼 낙하하면서 보이는 풍경의 짜릿함을 맛보기 위해 스카이다이빙을 하러 팟타이에 갔다. 목숨포기각서에 서명을 하고 경비행기를 타고 2만피트의 상공에서 수직낙하와 함께 360도 회전을 하면서 보는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두근거리는 경험이었다. 이후 예상치 못하게 남아 도는 오후 시간을 보내려 갔던 예정에 없던 카오산 로드…


어디에선가 들어오는 함성소리와 함께 바람에 형형색색 나부끼는 깃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 커다란 용과 함께 용선(龍船) 축제를 하는 여러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잠시 피곤한 몸을 쉬며 태국에서 열리는 중국 설날 축제를 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이겠거니 싶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철문이 굳게 닫혀진 한 은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은행 앞에는 한쪽에는 세명으로 이루어진 한 그룹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레게머리를 한 남자가 뭔가를 먹으며 앉아 있었다. 나는 무언가 먹고 있었던 그 한 남자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용선축제를 보고 있다가 우연히 그 레게머리 프랑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한국과 프랑스, 지구의 정 반대편에서 서로의 삶을 살고 있었던 우리 두 명은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삶의 교집합이 전혀 없었던 그 남자와 내가 바로 그 날, 그 시간, 바로 그 장소에서 마치 두 축의 인생의 직선이 만나는 교점처럼 우리는 영화처럼 만났다. 그리고 그 날의 인연이 결혼까지 이어져서 나는 40년간 살았던 한국의 생활을 뒤로 하고 프랑스 남부에 있는 한 시골마을에 정착을 하게 되었다. 이후 나의 삶은 "몰리에르 언어"로 불리는 프랑스어의 굴레 속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해외 여행을 할 때는 그 나라 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영원히 그 나라에서 체류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떠나는 날이 예정되어 있는 여행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쉬움이 수반되었다. 쳇바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풍경들과 다른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새로운 경험을 쌓는 것만으로 여행은 충분히 가슴을 설레게 했다. 게다가 그 나라 언어로 현지인들과 의견을 충돌시킬 필요도 없었고, 행정처리를 위해 그 나라 언어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 나라 언어로 노동시장에서 현지인들과 동등하게 경쟁하며 일을 구해야 하는 의무도  없었다. 해외여행과 실제 해외에서의 삶의 차이는 매우 컸는데,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큰 차이는 언어적 굴레였다. 언어적 굴레라는 것을 막상 겪어보니 단순한 어려움을 넘어서서 굉장히 심리적으로 복잡한 깊은 부분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자존감 박탈과 정신적 사회적 고립으로 모국어를 포함해서 모든 언어의 상실의 수준까지 영향을 미쳤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나의 지능은 성인의 수준이었지만 마흔이 넘어서 전혀 공부해 본적이 없는 프랑스어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단어들은 아이들보다 더 수준이 낮았다. 귀가 있어서 듣기는 하지만 무슨 의미인지 뇌 속에 전달이 되지 않고, 입이 있는데 내 생각을 제대로 말할 수 없다라는 사실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외국어를 하지 못해도 문제가 없었던 해외 여행을 하거나 외국어를 사용해서 일을 할 지라도 내 의견을 명확하게 모국어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한국에서 계속 살 때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이었다. 프랑스 남부 시골에 살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불가능으로 언어적으로 고립되고 일자리가 없는 시골에 살면서 사회적으로 고립됨으로써 나는 절대적 고립(isolement absolu)의 상태에 놓이게 되면서 나의 자존감은 지구의 맨틀과 외핵 뚫고 내핵까지 떨어졌다. 언어에 대한 정신적 고통은 모든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다라는 사실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까지 축소하는 듯 싶었다. 한국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석사학위도 받았던 내가 이렇게 무능력했었나 싶었다. 프랑스의 행정처리를 하면서 프랑스어에 대한 스트레스는 지수적으로 폭발 증가했다.


만약 내가 프랑스 시골이 아니라 배울 수 있는 대학이라도 있는 도시에 살았더라면 상황은 괜찮았을텐데…, 한국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살고 있는 도시에 살았으면 덜 힘들었을텐데…, 만약 내 남편이 행정처리를 하는 것을 도와 주는 사람이었으면 프랑스에서의 내 삶은 조금은 덜 힘들었을텐데…, 만약 내 남편이 한국어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아니 최소한 영어를 잘 구사했더라면 내가 프랑스어를 배우느라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었을텐데…, 등등 현실에 대한 반대를 가정하는 수없이 많은 가정법의 문장이 나의 머릿속을 오랫동안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프랑스에 살면서 내가 온전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자립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프랑스어가 가장 우선 순위라고 생각했다. 일단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말을 읽고 듣고 쓰고 말할 줄 알아야 사람들과도 의사소통하고 일자리도 찾을 수 있다고 말이다. 운전면허를 따려고 해도 프랑스어로 쓰여진 시험 문제를 이해를 해야 되고, 포마씨옹이라도 듣고 싶어도 프랑스어를 이해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며, 행정 처리를 할 때도 프랑스어를 알아야 일처리가 가능하다. 프랑스에 7년 6개월 살고 있는 지금도 편지를 써야 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마흔이 넘은 중년의 나이에 알고 있는 것도 잊어버릴 나이에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다니… 아무리 노력해 봐야 젊은 애들에 비해 아무것도 아닐 텐데… 이미 나이 자체가 걸림돌인데 라며 노력하는 사람을 비웃으며 사기를 꺽는 사람들이 나의 주변에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악의적인 비웃는 말들을 하는 독성적인 사람들의 말이 아닌 쓰레기를 귀담아 듣고 싶지 않았다. 마흔 넘어서 시작하게 된 프랑스어를 내가 언제까지 공부할 수 있겠는가? 곧 쉰살을 앞두고 있는 내가 제대로 된 시력으로 언제까지 책을 읽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기 때문에 나는 내 눈이 보이는 한 최대한 프랑스어 실력을 끌어올리고 싶었다. 노안이 와서 눈이 안보이면 귀로 들으면서라도 프랑스어를 향상시킬 수 있는 그 수준까지는 적어도 향상시키고 싶었다.


죽기 전에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이라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시작했던 생존 프랑스어, 그 이후 국립대 어학원, 포마씨옹, 인턴생활 등을 하며 프랑스어 수준을 향상시켰다. 현재 나는 남편의 행정처리까지 도맡아서 하고 있을 정도로 프랑스어 수준을 향상시키게 되었다. 더불어 현재는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하는 프랑스인들에게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국 문화도 가르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무엇에 중요성을 두는지는 본인의 삶의 가치관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 나는 2016년 프랑스에서 결혼을 했고 2017년 OFII가 지정했던 기관에서 프랑스어를 배워야 했다. 나는 프랑스어 수업을 받으면서, N, Y, A 이렇게 세 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우리가 구사하는 프랑스어 수준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요. 제 이름은 OO입니다…” 이 수준을 벗어나는 표현은 구사할 수 없었다. 우리 네 명은 똑같이 프랑스어로 우리 생각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


영국 국적을 가진 A와 나는 영어로 대화했다. 그리고 라오스 언어를 말하는 N과 중국어만 할 수 있는 Y와의 대화는 거의 의성어(onomatopée)로 대화했다. N과 Y의 대화를 들으며 정말 신기했던 점 하나는 서로 동문서답하면서도 대화가 전혀 끊기지 않으며 부정확한 발음으로 단어 몇 개와 의성어(onomatopée)만으로 매번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이 말하는 주제는 먹는 것, 요리하기, 본인들의 자녀들 이야기, 주말에 뭐 했는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현재 2024년, 그 동안 우리 네 명이 선택한 삶의 궤적은 많이 달랐다. 우리 중에서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 전인 2000년부터 살고 있는 중국출신 Y는 남편이 프랑스어, 중국어, 영어, 스페인어를 구사하기에 집에서 남편과 의사소통을 중국어로 했다. Y는 중국어만 말할 수 있어도 그녀가 일상생활을 하는 게 어려움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시장에서 ‘넴’을 만들어서 팔거나 주문 배달 맛집을 남편과 같이 일하고 있기에 그녀 남편이 모두 언어에 관련된 문제는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Y의 행정처리도 모두 그녀 남편이 도맡아서 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는 프랑스어 문장은 아직까지 10문장이 넘어가지 않는다. 내가 항암치료를 받는것에 불안해하다는 말을 했지만 남편의 통역 없이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는 “다음에 또 만나”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라오스 출신인 N은 2007년에 아일랜드 출신의 남편과 결혼해서 살고 있다.  에피소드 13화 “노동시장에서의 프랑스어”에서 소개했던 N덕분에 나는 첫번째 했던 인턴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N의 남편은 영어만 구사할 수 있기에 이 커플들의 의사소통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N의 남편은 항상 N에게 이해를 못하고 아무것도 기억을 못한다는 말을 매일 반복한다. N이 영어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의 커플이 의견충돌을 해결해 나가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여하튼 N은 프랑스어 수준은 내가 그녀를 만났던 2017년 상태에서 멈추어 있고 그녀가 처리해야 하는 프랑스의 행정문제는 사회복지사(assistante sociale)가 종종 해결해 준다.


영국 국적을 가진 A는 영국에서 아동심리상담사로 일하다가 영국인 남편을 만나서 결혼하고 남편 건강으로 인해 영국을 떠나서 날씨 좋은 프랑스 남부에 정착한 커플이다. 나처럼 옆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A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출산하고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아이를 돌보았다. 그 이후 프랑스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기에 아동심리상담사로 일하기는 힘들었고 관광객을 맞이하는 호화저택인 샤또(château)에서 청소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 런던에서 결혼해서 살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A커플은 프랑스 남부 시골, 내가 살고 있는 옆 마을 시골에 정착한 뒤로는 그들의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이사와서 시골의 단조로움으로 인해 그들의 사이가 악화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2023년 A는 남편과는 이혼을 했고 현재 독립적인 솔로의 삶을 살고 있다. 올해 초, 2024년 2월에 DELF B1을 합격해서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덩달아 기뻤다.


내가 프랑스에 도착했을 무렵 2017년 만났던 N, Y, A과 나, 우리 네 명이 만났을 때 우리의 출발점은 같았다. 우리는 똑같이 프랑스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우리 네 명이 삶의 우선 순위에 따라 선택한 길은 달랐다. N, Y, A에게 우선 순위는 재정적 수입을 창출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나에게 우선 순위는 나의 의사 표현의 자유인 ‘프랑스어’였다.


먹고 살려고 하니 일도 해야 하지만 말을 못하면 육체노동을 하는 일자리밖에 없다. 중년의 나이로 육체 노동이 힘든 일을 하지 못한다면 두뇌를 사용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일자리도 부족한 시골에 두뇌를 사용하는 일자리는 현지인들과 엄청난 경쟁을 해야 한다는 말도 된다. 주부로서 주어진 집안일도 해야 되는 데 취업을 하기 위한 노력도 해야 한다. 하루하루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하더라도 집안일과 취업을 위한 노동 시장에서의 실력을 키우기 위한 이 모든 것을 해내기에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죽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답답하다.


이렇게 희망보다는 절망적인 불투명한 미래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가 프랑스에 살고 있는 이상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얼마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느냐가 앞으로의 나의 인생에 가장 커다란 문제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프랑스어라고 생각한다. 프랑스에 도착해서 초기에는 프랑스 공화국이라고 쓰여 있고 그 위에 프랑스 국기와 마리안느(Marianne)가 찍혀 있는 관공서 봉투가 도착하면 스트레스였다. 봉투를 열어보면 영어처럼 알파벳으로 쓰여있지만 전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는 프랑스어로 쓰여있었기에 몇 시간이고 걸려 단어를 찾고 해독을 했었다. 지금은 집에서 내가 서류 처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관공서 서류를 받아도 열어서 읽어보고  답장을 써야 하는 상황에는 그 답장도 내가 쓰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살 때 “좋은 게 좋은거지, 너무 따지고 까다롭게 굴지 말자”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본인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하나 둘 씩 넘어가다 보면 어느새 바보가 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3주 전에 관공서에서 전화 인터뷰가 있어서 약속 시간에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건만 20분이 지나서야 이메일 한통이 와서 행정 직원의 청각문제의 사정으로 인터뷰를 못하겠다는 이메일이 왔다. 그리고 며칠 후 이메일 한통을 받았는데 그 안에는 내가 그 인터뷰에 참석하지 않아서 제재를 가하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인터뷰를 아무런 예고없이 당일 취소한 것은 행정 직원인데 오히려 내가 그 인터뷰에 참석을 하지 않았다며 제재를 가한다니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래서 그 행정 직원이 보냈던 이메일을 캡쳐해서 부당하다는 이메일을 보냈더니 그 제재조치를 철회하겠다는 답장을 받았다. 이 상황에서 만약 내가 그 부당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히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지 생각해보면 눈 앞이 캄캄해진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열심히 노력해서 혼자 헤쳐 나갈 수 있는 지금의 수준까지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이 든다.


한 가지 분명하게 한국과 프랑스의 가장 큰 다른 점은 프랑스 사람들은 철저하게 “개인주의”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개인적이라서 본인의 의견을 명확히 표현하고 본인의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본인이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하면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3주 전에도 행정기관에 한통의 편지를 내가 보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억울하게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 직장에서 따돌림과 차별을 받았다면 또한 어떻게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겠는가? 아이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면 부모로서 어떻게 대처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 사회 시스템을 더 공부하고 본인의 의견을 똑바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며 본인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부당한 일을 덜 당하게 되고 본인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나의 가족도 지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생 인생이라는 크고 오랜 항해를 하고 있다. 우리 인생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인생을  주관적인 인생의 우선 순위에 따라 가고자 하는 길을 선택한다. 내가 프랑스에 도착했던 초기에 만났던 타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인 우리 네명,  N, Y, A 그리고 나. 우리가 선택했던 길은 서로 달랐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다시 우연히 마주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니 우리는 비슷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서로의 고민과 문제의 해결책을 이야기하면서 결국 우리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서로가 선택해서 살아온 길은 달랐지만 가고자 하는 도착지는 어차피 같구나… 라고 느꼈다.

 

타국에 살고 있는 이민자인 우리는 타의적으로 뿌리를 뽑히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뿌리를 뽑아서 타국에 본인의  둥지를 틀었던 간에 어쨌든 고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이질적인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며 자기가 있을 자리를 찾아서 본인의 힘으로 뿌리를 튼튼히 내리려 하고 있다. 비바람에 쉽게 쓰러져 뿌리 뽑히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 성인으로서 본인의 삶에 책임을 지기 위해 본인의 몫을 해내고자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결국 우리는 선택지는 달라도 도착지는 하나, 바로 자립(autonomie)을 향해 오늘도 한 걸음씩 힘차게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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