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난국에도 봄 처녀가 동네 곳곳에 나타났다. 우리 가족은 거실 창밖 햇살 유혹에 넘어가 동네 앞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진달래를 보며 등산로를 걷는 등산객의 발걸음이 가볍다. 어디를 가도 벗지 못하던 마스크를 벗고 숲속 공기를 양껏 들이켰다. 약수터에서 본 산수유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제주도에서 본 유채꽃을 떠올리게 했다.
결혼식 당일은 경황이 없어 어떻게 예식을 마쳤는지 정신이 없었다. 결혼 한 지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니 믿기지 않는다. 결혼식 올리기 전 아내는 드레스 입고 야외 촬영을 하고 싶어 했었다. 야외 촬영은 나중에 하자고 약속은 했지만, 형편이 어렵고 마음의 여유가 없어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다 수십 년이 흘렀다.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지키지 못한 약속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더 늦으면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리마인드 웨딩 야외 촬영을 제주도에서 하자고 아내에게 운을 띄웠다.
아내가 제주도 현지 웨딩스튜디오에 전화해 리마인드 촬영 비용을 알아보았다. 예복 빌리고 화장하고 촬영 장소까지 차량으로 이동해서 사진작가가 찍으면 비싸다고 했다. 아내는 작가에게 맡기지 말고 촬영에 필요한 소품을 인터넷에서 구매해 재미 삼아 손수 찍자고 했다. 2박 3일 여행 일정으로 촬영 소품을 챙겨 오전 일곱 시 비행기에 올랐다.
제주 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타고 성산 일출봉 주차장에 도착했다. 일출봉 분화구에는 자연이 만들어 낸 초록빛 풀이 춤추듯 가볍게 흔들렸다. 수평선 너머에 아버지가 계신지 가보고 싶은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일출봉에서 사진을 찍고 내려와 단골 식당에서 보말 칼국수를 먹었다.
이튿날 촬영 준비물을 챙겨 정오 즈음 표선면 가시리 유채꽃 축제장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넓디넓은 유채꽃 물결 사이로 먼저 도착한 상춘객이 꽃길을 거닐었다. 제주도는 언제 가도 좋은 곳이지만, 유채꽃이 만발한 계절의 경치가 으뜸이다. 솔솔 부는 바람과 함께 비치는 정오의 해맑은 햇빛에 시시각각 변하는 유채꽃이 매력적이다.
우리 가족이 웨딩 촬영 복장으로 유채꽃 사이를 걷자 상춘객들이 유심히 보았다. 풍차와 햇살이 어우러져 유채꽃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고 바람이 키워낸 유채꽃밭 전두리 벚나무에서 꽃비가 날렸다. 아내와 아들이 손으로 하트를 만들고 카메라 앞에 선 모습이 행복해 보인다.
가족이 꽃길만 걸을 수 있기를 바라며 사진을 찍을 때 유채꽃 사이로 신혼여행 온 부부가 나타났다. 신랑 신부에게 “예쁘고 멋지네요.”라고 인사하며 미소 지었다. 신랑도 “특별한 가족 여행을 오셨네요.”라며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유채꽃보다 더 예쁘고 아름다운 부부가 함박꽃처럼 웃는다. 신랑이 가족사진을 찍어 주겠다며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유채꽃에서 자세를 취한 모습을 보고 신부가 “가족 모습 예뻐요.”라고 말할 때 면사포가 바람에 춤추듯이 흔들렸다.
신랑이 함께 사진 찍자는 제안에 우리와 신혼부부는 카메라를 보고 눈웃음을 지었다. 우리 부부와 젊은 부부가 함께 찍은 사진에는 우리의 젊은 시절과 신혼부부의 미래가 공존하고 있었다. 세월의 양식을 먹고 온화한 모습으로 찍은 리마인드 웨딩 촬영은 두 번째 신혼여행 사진이 되었다. 유채꽃을 선명하게 화장시키는 고운 햇살에 사진 찍는 순간은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시간이었다. 사진작가가 아닌 손수 촬영한 미숙한 사진을 보며 먼 훗날 추억을 이야기할 날이 오겠지.
사진관에서 찍은 친구 부부의 사진을 아내가 보여 주었다. 친구의 자녀가 결혼 30주년 기념 리마인드 웨딩 촬영을 선물해 사진을 찍었다며 자랑했다고 한다. 친구 부부의 숙성된 모습에서 풍기는 진한 향기가 사진에 그대로 배어 있는 듯했다.
한 살이라도 더 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늦지 않게 현재의 모습을 담는 순간은 아름답다.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에 주름이 생겨도 가장 젊은 순간임을 기억하고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월꽃이 피고 백발이 되어가는 모습은 젊은 날처럼 풋풋하진 않아도 삶을 열심히 살아온 자랑스러운 얼굴이다.새순이 움트고 꽃망울을 터트리는 화사한 봄기운으로 어렵고 힘든 시기에 마음만은 따스한 빛으로 가득하길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