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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준 Sep 14. 2021

그대를 빛나게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말이 떠올라도 끝내 말 못 하고 왜 꾹 참는 것인지

키가 작고 몸이 약했던 나는 남들보다 잘하는 게 없어 늘 자신감이 부족했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달리기하면 꼴등 이거나 꼴등에서 2등을 주로 했다. 동네 친구 L은 키도 크고 달리기를 하면 언제나 1등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하고 손 솜씨도 좋아 무엇이든 잘 만들었다. 어린 마음에 내가 친구보다 상대적 열세라는 사실에 두려움이 컸다. 


내가 못 가진 것을 다 가지고 함께 크는 친구와 달리 나는 그저 그러한 아이로 성장했다. 번번이 꿈이 바뀌던 나는 진로를 잡지 못하고 혼돈의 시간 속을 오래 걸으며 열등감에 빠졌다. 


나는 누구인가? 자아를 찾지 못해 답답한 생활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나를 모른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나와 맺은 인연이 나를 어떻게 평가할까 하는 의문이 들 뿐이다. 중·고등학교와 사회생활에서 맺은 대인관계는 한때 나를 괴롭혔다. 

  

우리는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며 의견 차이로 언쟁을 벌일 때가 가끔 있다. 나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다 보면 특히 언쟁을 벌일 때면 가슴속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말이 느리지 않고 말을 더듬는 편도 아닌데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언쟁에서는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언쟁에서 지고 나면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다. 밤새 이렇게 말해보고 저렇게 말을 가져다 이어보며 지난 순간을 떠올린다. 아! 오늘 낮에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을 했을 때 내가 이렇게 되받아쳤어야 했는데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해 혼자서 애를 태웠다. 


언쟁에서 패했다는 느낌이 들면 속상한 마음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잘 지내면서도 언쟁을 벌이면 언제부터인가 항상 지는 습성이 생겼다. 상대방의 말을 멋지게 되받아칠 수 있는 말이 생각난 순간, 그때는 이미 흘러간 시간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아직도 언쟁에서 꼭 이겨야겠다는 악착같은 마음이 없다. 아니 바보같이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당구를 치면서도 농담 반, 진담 반 언쟁이 벌어져도 항상 마지막 화살을 쏘지 못하고 친구의 화살을 맞는다. 친구는 나에게 상처의 화살을 쏘는데 왜 나는 현을 당기지 못하고 망설이는 걸까. 

  

언쟁 끝에 깔끔하게 승부를 짓는 말이 떠올라도 말하지 않는 이유는 이렇다. 내가 마지막 화살을 쏘면 ‘상대가 마음에 상처받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상대에게 무안한 상태를 만들고 싶지 않고 차라리 내가 아픔을 감수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이런 마음에 활시위를 당기지 않았다는 것을 상대는 알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이다. 


상처 줄까 말 한 마디 못하다가 한발 늦게 혼자 있을 때 그냥 활을 쏘아 상처를 줄 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말이 떠올라도 끝내 말 못 하고 왜 꾹 참는 것인지···. 꾹 참는 이유는 아마 남보다 부족하다는 열등의식에 아픔을 일찍이 알게 된 이유에서다. 아픔을 받기만 했던 나는 아픔을 주고 싶지 않은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거센 폭풍우와 싸우기도 하고 풀기도 하는 해변의 갯바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속에 잠겼다가 몸을 드러낸 갯바위들이 점잖은 미소를 흘리며 나를 반긴다. 상대의 화살을 맞고 상처를 받는 나와 거대한 파도를 맞으며 아픔을 감내하는 갯바위의 모습이 서로 닮아 보였다. 

  

갯바위와 가장 가까운 파도는 늘 변덕스럽다. 파도는 갯바위에게 봉두난발(蓬頭亂髮)한 모양새로 몸을 던지기 일쑤다. 그래도 갯바위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갯바위는 물속에서는 바다색으로 물들이고 물 밖에서는 하늘색으로 물들인다. 강한 파도와 맞서는 갯바위는 자신도 모르게 표면이 부서지고 상처가 생겨도 침묵으로 감싼다. 매번 파도에 흠씬 맞으면서도 품고 기다리면서 끌어안기만 하는 갯바위와 나는 저항을 포기한 아픔의 상처가 가득한 채로 살아왔다. 갯바위가 홀로 파도와 외로운 싸움을 벌이다 힘들어 지칠 때면 자신을 보듬고 위로하여 속에 품은 상처를 치유하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언쟁 중에 아주 알맞은 말로 되받아쳤다면 싸움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르고 나는 이겼다고 의기양양해 사람을 우습게보고 오만함으로 절대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그대로 내뱉지 않고 말을 삼키고 참는 습관은 나의 인성을 다듬고 나를 곧추세웠다. 확실히 응대할 수 있는 찰나에 마음은 섬이 아닌 섬이 되어 여운과 느낌 사이로 나의 숙명을 받아들였다. 


남들은 나를 바보라고 말해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의 뜻을 새기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그대를 빛나게’ 하는 것으로 체면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게 하여 그대가 웃을 수 있다면 나는 마음 아파하지 않겠다. 


우리네 삶이 내가 상처를 주고 이겼다고 으스댈 것도 내가 졌다고 마음 아파할 일도 아니다. 덧없이 보내버린 시간도 세월 속에서 점점 커가는 추억으로 자라고 순간의 인연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는다. 

  

쓸데없는 괜한 감정에 사로잡혀 괴로워하지 말고 나와 인연을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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