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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민준 Sep 22. 2021

사슴 섬

삭막한 섬에 도착한 바람이 교도소 벽을 어루만지며 슬프게 운다


울타리가 넓게 쳐진 섬이 보인다. 울타리 너머 파도가 넘실거리는 경계의 공간을 탈출하려면 영화 ‘빠삐용’의 주인공 같은 절박함이 필요해 보인다. 인권이나 생명의 존중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섬은 숲으로 쌓여 모든 사물이 가려진 채 밖에서는 그곳 실상을 알 수 없다. 마치 어둠의 세계로 빠져드는 시간과 공간마저 사라져 버린 듯하다.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섬에 갇힌 사람들의 억울한 상흔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한센인을 강제 이주시켜 격리 수용한 섬은 울타리가 견고하다. 육지에서 떨어져 그들만의 기억이 정지된 채 물 위에 정박해 있다.

 

눈썹이 없고 녹내장 탓에 흰 눈동자만 남은 한 사내가 나를 시험 하려는 듯 악수를 청했다. 그의 손가락은 피부 궤양으로 검지 한 마디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와 악수를 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악수한 손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마음은 손을 빨리 씻고 싶은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이곳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감금·체벌로 삶을 짓밟힌 한센인의 터전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평생 치료될 수 없는 상처를 품고 호접몽(胡蝶夢)을 꾸던 곳이기도 하다. 육신조차 안식처를 찾지 못했던 검시실 위 불빛의 긴장감이 내 목을 조여 왔다. 극심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며 영혼의 밑바닥에서 고독과 절망을 끌어안고 단종대(斷棕臺)에 누웠을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둠의 혼령을 앞세워 지옥 같은 빗장이 걸린 쪽방으로 들어섰다. 붉은 벽돌의 담장으로 쌓인 감금실은 폐허처럼 쓸쓸하다.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배가 지나가면 파도가 일 듯 자신의 상흔에 한탄이 일었다. 감시원의 예리한 눈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멈추고 그들 내면에 쌓인 슬픔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극한의 환경에서 자유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들은 참혹한 현실에 무기력하게 길들어졌다.


차가운 공기가 몸을 에워쌀 때 감독관의 폭언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눈물의 섬은 삶의 욕망을 꺾어 모은 곳이다. 그들이라고 왜 자신의 삶을 부정하며 인생을 새롭게 고치고 싶지 않았겠는가. 원한의 굴레를 눈물의 회한으로 말끔히 씻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봄꽃이 만개하듯, 억압된 환경에서 차단의 울타리를 건너 자유를 찾고 싶은 간절함은 허상의 세월이 되었다.

 

오래된 교도소 철문은 굳게 잠겨있다. 섬을 탈출하다 걸리면 섬 안의 작은 교도소에 더 단단히 가두었다. 햇살이 비치는 쇠창살로 덧대어진 문이 열리며 감독관이 아침의 정적을 열었을 것 같다. 인간의 힘으로 하릴없는 운명의 사슬에 포박된 채 저항해도 소용이 없다. 빨간 벽돌 건물 교도소 마당 양쪽은 철조망이 이중으로 막고 있다. 교도소 정문 아치(arch)에는 ‘희망의 마음’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 글귀의 허탈감은 목숨을 담보로 쇠창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음에 포기하고 만다. 인권을 유린당한 그들의 희망은 이미 허공으로 사라졌다. 창살 틈새로 눈부신 구원의 햇살이 사발 만한 크기로 비친다. 삭막한 섬에 도착한 바람이 교도소 벽을 어루만지며 슬프게 운다. 해변 한쪽 허름한 건물은 그들이 세상과 이별하는 마지막 장소, 화장터다.

  

모든 육체는 신이 빚어낸 걸작이다. 조물주는 왜 한센병이라는 것을 만들어 고통 받게 하는 걸까. 삶을 거역할 수 없는 인생이 있다는 것을 신은 그저 묵고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람의 고초를 만들어 무엇을 남기고 그것으로 무엇을 깨 달게 하려 했던 걸까?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던 한센인의 삶이 꺾여 고통의 시간은 먼지처럼 쌓였다. 한센병을 원망하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잠 못 들었을 그들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의미 없는 하루의 삶도 견뎌야 한다고 철문 안으로 들어온 어둠이 속삭인다. 신이 있다면 분명 나를 이곳에서 구원할 거라는 희망으로 꿈을 꾸며 드린 기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빵 한 조각 보다 그들의 삶을 따뜻하게 보듬는 말 한마디가 더 소중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감시의 눈초리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어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에 하늘을 본다. 나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더 견뎌야 그들의 어깨 위에 얹힌 먼지를 품을 수 있을까.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도 사랑을 나눠 가진 그들은 내 깨달음의 경지다.


우리는 자라면서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배웠을까! 정작 경쟁을 통해 살아남을 ‘나’만을 위한 원리를 배운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본다. 상생을 배운 것이 아닌 승자만을 위한 교육이었음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살아 볼만한 세상’은 가슴으로 안고 손으로 잡는 것이다.

 

소록도 곳곳, 그들의 상처가 배어있지 않은 곳이 없다. 형체는 고통의 발원지이나 마음은 곱고 순진하며 눈은 숭고한 정신을 배웠던 소록도. 그곳은 제힘으로 존재 가치를 섬기며 인생과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은 아니었을까. 용서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평생 마음의 수련이 필요함을 마음으로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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