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가 쉬운 얼굴이 있다.

# 연애가 어려운 얼굴도 있다. feat. 그게 바로 나임.

by 사랑의 생존자


“연애만큼 쉬운 게 또 있을까요?”

설날 저녁이었다. 떡국을 두 그릇이나 먹고 나니 배가 묵직해져 눈꺼풀이 슬슬 내려오던 찰나, 그녀의 한 마디에 졸음이 확 달아났다.


“아가씨, 어떻게 연애가 쉬울 수가 있어요?”

아가씨라고 부르며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지만, 사실 나보다 일곱 살 어린 동생 같은 존재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이 제법 충격적이었다.


“그냥 다 만나자고 하던데요? 제 사진 보고도 다 괜찮다고 하고. 자랑은 아니지만, 남자친구 사귀는 게 제일 쉬웠던 것 같아요. 근데 언니, 이거 너무 맛있어요.”


아가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좋아하는 설향 딸기 두 개를 한꺼번에 입에 욱여넣으면서.


“원래 만만한 애들이 끊임없이 대시를 받는 거야.”


재작년 아가씨와 결혼한 우석 씨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끼어들었다. 비웃는 말투와 달리, 아가씨 입가에 묻은 딸기즙을 쓱 닦아주는 손끝은 신혼 특유의 다정함이 묻어난다.


나는 눈앞의 아가씨를 천천히 바라봤다.

하얀 피부에 맑은 다갈색 눈,

부드럽게 굽은 갈색 긴 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날씬한 몸매.

부담스럽지 않게 예쁘고,

튀지 않으면서 사랑스러운 타입.


솔직히 절세미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굳이 남자가 마다할 이유가 없는 외모랄까.

한마디로,

연애하기 딱 좋은 얼굴이었다.


“야, 너는 니 입으로 그렇게 자기 자랑하면 안 민망하냐.”


가만히 여동생의 말을 듣고 있던 H군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듣는 체도 않고, 딸기를 하나 더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오빠, 나는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연애는 일단 만나고, 아님 말고라는 생각으로 가는 거잖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애를 대하는 태도까지 가벼웠다.

그녀는 외모도, 태도도 연애에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아가씨의 연애 공식은 단순했다.

1.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간다. (학교, 직장 등)

2. 몇 명이 자신을 좋다고 한다.

3. 그중 제일 괜찮은 사람을 고른다.

끝.


마치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는데 성적이 이렇게 나왔네요.”라는 수능 만점자 인터뷰 같았다. 연애든 공부든 세상에는 노력해도 잘 안 되는 사람이 있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쉽게 되는 사람이 있다. 다만 연애가 ‘잘 안 되는 사람’ 쪽에 속했던 내 입장에서는 저런 대답은 솔직히 좀 허탈하게 들렸다.


잠시 아가씨에게서 눈을 떼고 베란다 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쭉 찢어진 작은 눈,

낮은 콧대.

작은 키에 볼륨감이라곤 없는 몸매.

동양적이라고 우겨보고 싶지만 솔직히 말하면 생기다 만 얼굴이다.


심지어 취향까지 독특해 20대 시절엔 ‘개성 있다’는 말을 방패 삼아 난해한 옷까지 즐겨 입었다. 친했던 대학교 남자 동기 하나는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너는 왜 마녀처럼 옷을 입고 다녀?”


나는 그때 꽤 진지하게 설명했다.

이건 마녀가 아니라 히피풍이라고.

이 촌스러운 녀석아.


어쨌든 결과적으로 말하면 한국 남자들이 흔히 좋아하는 취향과 나의 접점은 그리 넓지 않았다. 나를 대놓고 싫어하진 않았지만, “와, 쟤랑 사귀고 싶다.”를 유발하는 외모도, 성격도 아니었다. 그래서 아가씨와 내 연애 공식은 조금 달랐다.


내 경우는 대체로 이랬다.

1. 사람이 있는 곳에 간다.

2. 아무 일도 없다.

끝.


아주 가끔은 이렇기도 했다.

1. 사람이 있는 곳에 간다.

2.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난다.

3. 상대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끝.

혹은 더 드물게,

1. 사람이 있는 곳에 간다.

2.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

3. 상대가 내 마음에 안 든다.

끝.

연애란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고, 상대도 나를 좋아하는 상태.

이 단순한 공식이 내 인생에서는 기적처럼 느껴졌다.

호감 가는 외모라는 것은 그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티켓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어도 선택받는 사람이 있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후자였고, 그래서 조금 억울했다. 아니, 많이 억울했다.


그래서 결심했더랬다. 어차피 매한가지라면, 가만히 앉아 선택받기를 기다리지만은 않기로. 희박한 확률에 풀이 죽어 ‘0’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야 여자가 먼저 다가가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니라지만, 내가 스무 살이던 땐 “여자는 자고로 고백을 받는 존재다.”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떠돌았던 시대였다.


여자라면 사랑을 쟁취하기보다, 사랑을 받는 쪽이 더 ‘예쁜 그림’이던 시절. 주변 친구들의 연애는 대부분 남자 쪽의 대시로 시작됐고, 나는 그 세계의 바깥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자존심을 세워봤자 뭐하나.

어차피 나를 좋다고 하는 남자는 거의 없었다. 정말 가뭄에 콩 나듯 누군가 호감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십중팔구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선택받는’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선택하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도망치지 말자.

괜히 튕기지도 말자.

일단 최선을 다하자!


이런 연애 방식 덕분인지 몇몇 친구들은 나를 ‘용기 있는 신여성’이라며 치켜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용기와 다짐만으로는 현실이 바뀌지는 않았다.


필살기가 필요했다. 내 외모가 연애 시장의 티켓이 되지 못한다면 다른 무기를 만들어야 했다.

문제는, ‘외모 말고’ 남자에게 이성적으로 어필할 무기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내 나이 스물둘,

아주 우연히 나는 그 무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당시 다니던 교회에는 잘생기고, 노래 잘하던 인기 많은 오빠가 있었다. 만인의 연인이었기에, 나는 애초에 후보군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그의 생일이었다. 당시 교회에서는 생일인 사람에게 돌아가며 작은 선물을 주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나는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선물 대신 손편지 한 장을 건넸다.


친하지도 않았으니 할 말이 없어 별 시답지 않은 내 하루 이야기로 편지 한 장을 채웠고, 마지막에 “아, 일단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담백하게 써넣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오빠에게 갖가지의 포장된 선물을 건넬 때 나는 작은 종이쪽지 하나였으니 오히려 조금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몇 주 뒤,

오빠가 나를 불러 세웠다.


“나, 네가 준 편지 지갑에 넣고 다니잖아.”


지갑에서 꼬깃꼬깃 접힌 내 편지를 꺼내며 씨익 웃는 그 잘생긴 얼굴을 보는 순간, 난 깨달았다.

찾았구나,

내 필살기!


그 오빠와 결국 사귀지는 못했다. 하지만 몇 번의 단둘이 만남과 밤새 이어진 통화들, 썸이라 부르는 특유의 그 애매한 기류는 분명 존재했다. 언감생심 쳐다보지도 못하던 오빠의 이성적인 관심을 고작 편지 한 장으로 얻어냈으니 효과는 물론 가성비까지 갖춘 무기였다. 하늘은 포기하지 않는 나를 갸륵히 여겨 편지를 쓰는 능력을 주셨던 모양이다.

그 이후로 호감 가는 사람이 생기면 편지를 썼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자들. 말로는 잘 못하는 감정을 종이에 옮겼다. 백발백중은 아니었지만, 꽤 높은 확률로 통했다.

나는 그렇게 편지라는 내 무기를 계속 강화해 나갔다. 부담스럽지 않게, 유쾌함을 곁들이고, 외모에서 드러나지 않는 나의 귀여움과 여성스러움을 어필했다. 게다가 손편지를 쓰는 사람이 드문 시대였으니 희소가치까지 있었다.


H군과 연애할 때는 그가 일하는 카페 근처에 편지를 숨겨두곤 했다. 일이 끝난 후 그걸 찾는 순간이 제일 설렜다고, 나중에 H가 몇 번이나 되뇌듯 말했다.


남자에게 인기 없는 외길 인생 삼십여 년.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덕분에 나만의 필살기를 발견했으니, 세상일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남자에게 호감 가지 않는 외모에는 의외의 장점이 더 있었는데, 바로 ‘필터’였다.


사람에게 쓰레기라는 표현은 거칠지만, 굳이 순화할 생각은 안 드는 그런 부류가 분명 있었다.

여자를 오로지 외모순으로 줄 세우는 놈.

연인을 소유물처럼 다루는 놈.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놈 등등.


신기하게도 그런 부류는 내 앞에서 굳이 매너 좋은 척을 하지 않았다. 예쁜 여자들 앞에서만 친절이 작동하던 남자들. 덕분의 나는 그들의 기본 설정값을 일찍이 볼 수 있었다.


호감 가는 외모가 연애의 ‘티켓’이라면,

호감 가지 않는 외모는 남자를 거르는 ‘필터’였다.


연애의 최종 목적지를 결혼이라고 가정한다면 결국 한 사람만 제대로 만나면 된다. 선택지가 많다고 해서 꼭 축복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 한 번의 정확한 선택이다. 그런 면에서 이 필터는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나는 연애든 결혼이든 “이 정도면 됐다.” 하고 자족하며 살고 있으니, (물론 우리 엄마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인생 아닌가.


음,

그래도 말이다.

다시 태어나면 절세미녀로 태어나

이 필터 없이 한 번 살아보고 싶다.

그땐 또 어떤 전략을 세우게 될지 궁금하니까.


아무튼,

뭐 그렇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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