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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세계와 레바니즈

by YT

2020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 화학약품으로 인한 커다란 폭발사고가 있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고 직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폐허로 변한 베이루트를 방문한 것과 당시 레바논 사람들 다수는 프랑스와의 합병과 위임통치를 마크롱에게 피력했다는 사실도 잘 알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는 어떻게 ‘우리를 다스려주세요’라는 굴욕적인 말을 다른 나라 대통령에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바논의 역사를 알고, 레바니즈(레바논 사람)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여러 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레바논 인구의 약 50%(이제는 좀 더 줄어서 40% 정도 일 것으로 추정)는 기독교도이다. 이 기독교도는 ‘마론파’라고 하는데, 기독교 초창기부터 이어지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오래된 기독교 종파 중의 하나이고, 우리가 잘 아는 ‘칼릴 지브란’이 마로나이트에 속한다. 이들은 레바논 산맥과 안티 레바논 산맥의 산중에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며 살았고, 과거부터 프랑스 주교 및 교구의 영향력에 있었다. 그래서 1차 십자군이 중동 몇몇 곳에 짧은 기독교 해방구를 만들 때, 레바논 지역은 프랑스와 좀 더 직접적인 인연을 만들게 된다. 십자군이 물러난 이후에는 오스만 제국의 우산 아래서 역시 산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해체 시기인 1900년 대 초반에 영국을 위시한 서구 세력에 의해 다시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당시 레바논 지역은 과거로부터의 인연을 강조하는 프랑스에 넘어가고, 현재의 시리아 지역과 더불어 프랑스의 식민지를 오랜 기간 겪게 된다. 이런 연유로 현재 레바논 지역은 역사적, 종교적으로 프랑스와 친밀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독립 이후, 1960-70년대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는 ‘중동의 파리’로 불리며 중동지역 최고의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지만, 1980년대 무슬림과 기독교도들 간의 10년간의 내전으로 베이루트는 철저하게 파괴되고, 레바니즈(레바논 사람들)들의 상당수는 주변지역 및 아라비아 반도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된다. 이때 갓 생성된 아라비아 반도 국가들은 석유의 발견으로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랍어가 되고, 영어와 불어가 능숙한 레바니즈들은 사우디 아라비아, UAE,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등에서 몸값이 치솟게 되었다. 현재 아라비아 반도 내, 기업들의 보편적인 인종 스펙트럼을 살펴보면, 가장 상층부 돈은 많지만 경영능력이 없는 로컬 아랍인인 경우가 많고, 그 밑에 월급쟁이 CEO나 CMO(Chief Marketing Officer)는 영국인 혹은 레바니즈이고, 그 밑으로 매니저 급 및 노동자 급으로 인도, 파키스탄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중동 기업의 위계구조이다.

특히, 레바니즈들은 방송, 마케팅, 광고 같은 분야에 많은데, 특히, 방송 및 광고 산업은 소위 ‘레바니즈 마피아’라 불리는 레바니즈들의 인맥에 의하여 현재도 장악되어 있다. 외관상 글로벌 회사로 보이지만, 큰 광고회사의 대부분 CEO 레벨은 모두 레바니즈들이다. 또, Pan Arab 방송국의 대부분은 레바니즈에 의해 경영되고 있다. (하지만 소유는 다른 문제다. Pan Arab 채널의 많은 부분은 사우디 왕가의 자본에 의해 점유되고 있다. 소유는 경제력의 문제인 것이다) 또 레바니즈는 Future TV(레바논 총리를 지냈고, 최근에 암살당한 하리리 가문 소유)와 LBC(레바니즈 연합회 같은 조직 소유)를 직접 소유하고 있다. 특히 마케팅 분야에서 레바니즈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것은 Chouri Group의 영향이다. 이 역시 레바니즈 마피아에 의해 소유되고 있는데, 주요 Pan Arab 방송국의 광고 판매 대행권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곳이다.

레바논 마론파 기독교도는 무슬림들에 비해 교육열이 매우 높고,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웬만한 사람은 아랍어, 프랑스어, 영어 3개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한다. 식민지 시절부터 매우 개방적인 환경에서 자랐고, 교육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그 교육의 자산이 오늘날 GULF 및 아랍 지역에서 레바니즈의 국제 비즈니스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교육과 식민지의 경험이 레바니즈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한 것이라면, 10년간의 내전은 그런 교육된 레바니즈를 걸프와 아랍 지역으로 흩뿌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내전 직후에 레바니즈들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그리스의 아테네와 아라비아 반도의 바레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수의 레바니즈계 중동 기업의 모 회사가 그리스의 아테네, 혹은 바레인인 경우가 많다. 바레인으로 정착한 레바니즈들은 사우디의 종교적인 엄격함의 영향에서 벋어 나고자 대안을 모색하던 중, 당시 기획 도시로 서서히 개발을 계획하던 두바이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많은 수의 레바니즈는 두바이에 정착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중동 어디서든 레바니즈를 볼 수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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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을 여행하면, 아직 내전의 상흔(총알의 흔적이 남아있는 빌딩)을 가진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베이루트 도심의 수많은 노천카페는 프랑스를 닮았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프랑스어를 자주 듣게 될 것이다. 두바이의 레바니즈들은 서로 프랑스어로 말하는 경우가 많고, 자식들을 프랑스 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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