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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T Apr 24. 2024

환상

[오향거리], [멜랑콜리아], [픽션들]에서의 환상

소설에서 ‘환상’은 이제 전가의 보도가 된 느낌이다. 어떻게 환상은 이렇게 높은 지위를 얻게 된 것일까? 1900년대 초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가 비평의 칼을 휘두를 때, 소설 속 많은 병적 심리와 퇴폐성은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 그런데 오늘날 다시 이런 심리 현상에 어느 정도 기반한다고 짐작되는 ‘환상’은 무시할 수 없는 주류로 부활했다. 젠체하는 형식적 우월감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생각을 피력해 본다면) 사람의 세상이 근대와 현대로 익어가면서 실제로 ‘모호함’ 혹은 ‘경계성’의 불확실성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현상은 명확하지 않고, 명확한 진리라고 여겨지 던 것들은 뿌리까지 부유하며 휩쓸리고, 기초적인 물질과 현상조차 생각지 못했던 것들의 혼종이거나 복합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이런 환경과 접촉하는 인간, 주체 역시 불안하게 흔들리며, 다층적으로 인식되고 존재는 몇 개의 모호한 대상으로 분해되기도 한다. 이런 현상들 위에 안갯속 희미함 같은 환상이 자란다. (이 부분은 좀 더 고민되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오늘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최근에 읽은 소설들의 각기 다른 ‘환상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다.

[멜랑콜리아]에서 욘 포세가 다루는 환상은 개인적인 차원의 환상이다. 개인 차원의 환상은 기억의 문제와 깊이 닿아있고, 불안과 강박 같은 정신병을 그 근간으로 한다. 주인공의 민감성, 강박과 공포는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으로, 존재 자체의 불안에 해당한다. 소설에서 욘 포세는 ‘반복과 변주’라는 특별한 서술 방식을 통해 주인공을 둘러싸고 있는 안개 같은 ‘환상’을 다룬다.

그런데 [오향거리]에서 찬쉐가 다루는 환상은 욘 포세의 그것과는 달리 집단적이고 사회적이다. 찬쉐의 환상은 무지, 소문(풍문), 소통의 단절에 기인한다. 개인에게서 비롯된 말과 생각들이 시장으로 나와서 휩쓸리며, 왜곡되고, 나름의 에너지를 만들고 점점 증폭된다. 이렇게 집단적으로 형성된 환상은 나치즘의 발현, 문화 대혁명의 폭주 같은 매우 비인간적인 집단성, 집단의 광포함을 설명하는 모델도 될 수 있을 듯하다. ([오향거리]에서의 환상은 문화 대혁명(실체)과는 달리 체계로 포섭되며 순화된다)

마지막으로 보르헤스의 [픽션들]의 단편에서 보이는 환상은 좀 더 구조적인 환상이다. 특히 [바벨의 도서관],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감지되는 환상은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진, 현재/실재의 바탕에 세워지지 않은 완전히 다른 하늘에 세워진 성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환상은 동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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