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처음 정한 ‘귀향’이라는 제목이 더 어울릴 것 같지만, [풍아송]으로 정함으로써 소설의 내용은 (작가의) 의도에 대한 은유로 더 도드라지게 되었다. 뒷부분 작가의 말에서 옌롄커는 ‘지식인의 무능과 무력감에 대한 혐오’를 창작의 의도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도로 볼 때, 반성과 진정한 의미의 진보(또는 회귀)를 포함하는 귀향보다는, 좀 더 도발적이고, 혐오감을 부추기는 [풍아송]이라는 제목이 더 노골적이고 타당해 보인다. 제목과 그 현학적인 구성은 내용을 증폭한다.
제목의 직접적 도발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귀향’이 더 적합해 보인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지식인에 대한 소시민성, 지질함의 여정으로 몰기보다는 주인공 양커의 노정은 시원(始原)을 향해가는 거룩한 여정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마치 [시경]의 발생 시점과 비슷한 공동체 생활과 ‘오줌 멀리 보내기’ 같은 행위들은 원시성의 회복이고, 어쩌면 물질적 현대에 대비되는 원시적인 공동체의 건설과 확장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속을 피해 몰려든 창녀들과 세속의 치열한 대결에서 패배한 지식인으로 구성된 원시공동체의 구상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에 대한 무력감과 혐오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두터운 줄기를 형성한다. ‘지식인’. 이 개념은 소유의 바탕에서 세워진 것이다. 양심의 가책과 도덕이 채무관계에서 나오듯. 대학교수인 양커는 [시경]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했고, 자신의 여자(루핑, 링쩐, 샤오민)들 모두를 소유로 생각한다. 소유는 거미가 끈끈한 실을 입에서 토하여 먹이를 싸듯, 대상에 끈끈이를 씌운다. 대상에 욕망의 끈끈이를 뿌리는 것, 이것이 소유다. 지식에 대한 끈끈한 소유는 상대에 대한 비하와 집착으로 이어진다. 욕망은 이런 소유를 통해 세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