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둘기 Jan 02. 2024

아빠 생각

행복한 은퇴를 꿈꾸며

   최근 학교에서 두 분이 명예퇴직하셨다. 학교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된 것을 다른 후배들은 부러워했다. 퇴임식에서 두 분은 후배 교사들에게 마지막 인사 건넸다. 두 분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입을 뗐지만, 결국 두 분 모두 눈물을 보이셨다. 



두 선생님의 눈물을 보며, 은퇴란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봤다. 너무 먼 미래의 일이라 그분들 눈물의 의미를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좀 더 쉬운 질문으로 바꾸어 보았다. 직장을 그만둔 후 나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 처음에는 잠시나마 ‘모히토에 가서 몰디브나 한잔하는’ 상상에 빠졌다가, 얼마 전에 읽은 조던 피터슨 교수의 책 내용이 떠올랐다. 



“은퇴하면 한가로운 열대 해변에 앉아 햇살을 즐기며 마르가리타 칵테일을 마시고 싶습니다.” 이런 목표는 계획이 아니다. 여행을 유혹하는 포스터에 불과하다. 마르가리타를 여덟 잔쯤 마시면 다음 날 숙취로 고생할 게 뻔하고, 3주 정도 지나면 심심해서 괴로울 것이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 지독한 무기력증에 빠질 것이다. 이런 목표는 지속 가능한 인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생의 12가지 법칙 / 조던 피터슨)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아빠가 갑자기 컴퓨터로 EBS 강의를 듣고 계셨다. 중학교 한자 강의였다. 아빠에게 갑자기 왜 한자 강의를 듣냐고 물었다. 아빠께서는 대답했다. 이제 슬슬 영어 가르치는 것을 그만둬야겠다고. 앞으로는 동양철학 공부를 해보려 한다고. 



당시 학교에서 아빠를 소개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아빠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요즘 동양철학에 빠져 있다.” 

아빠는 아직도 그때 내가 쓴 글을  기억한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고, 내 눈에 아빠는 아직 젊었다. 동양철학 공부가 아버지만의 노후 준비였다는 것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빠가 동양철학이라고 말씀하신 학문은 ‘명리학’이었다. 생년월일을 통해 사람의 운명을 예측해보는 학문이다. 15년이 지난 지금, 아빠는 여전히 ‘명리학’을 공부한다. 모르는 한자를 찾아가며 명리학 책을 읽던 그는 이제 4권의 명리학 책을 쓴 저자가 되었다. 명리학을 가르치는 강사이자, 유명 명리학 카페의 운영자가 되었다. 유튜브 채널도 열었고, 구독자가 곧 만 명이 된다며 기뻐한다. 아빠를 보며,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취미가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지 느꼈다. 그는 나에게 바람직한 노후는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나에게 평생 함께할 수 있는 취미는 무엇이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지금까지 내가 가장 오래 꾸준히 지속해온 일은 무엇인가? 대학교 때 드럼을 열심히 쳤지만, 졸업 후에 단 한 번도 드럼 스틱을 잡은 적이 없다. 격투기는 그래도 꽤 꾸준히 했지만, 이제 더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 '나는 왜 이리도 끈기가 없는가' 자책을 하던 중 내가 과거에도, 지금도, 좋아하는 일이 떠올랐다. 바로 읽고, 쓰는 것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그 두 가지는 평생 좋아할 것 같다. 아직도 매일 더 많은 책을 읽고 싶고, 더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글은 써도 써도 실력이 느는 것 같지 않아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가 좋아하고 평생을 할 것이라면 조금 더 잘하고 싶은데,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그럴 때면 과거의 아빠를 떠올린다. 12간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0천간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를 외우기 위해 나에게 반복해서 말하던 아빠. 공책에 수십 번씩 적으며 한자를 외웠던 아빠. 그리고 지금의 아빠를 바라본다. 막힘없이 칠판에 한자를 적으며 강의를 하는 아빠, 매일 사무실에서 책을 쓰는 아빠. 은퇴한 후가 훨씬 즐겁고 편안해 보이는 아빠. 


옛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 속담을 증명할 시간이 나에게는 30년도 더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피천득 선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