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뛰어넘는 연륜

-육찢맘

by 진영


"아이가 책을 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책은 싫다고 하네요. 그리고 국어에 나오는 자기 생각을 표현하라는 것들을 힘들어 해요. 그런 걸 좀 잘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다른 애들은 엄마들이 책도 많이 읽어주고 그랬더라구요. 스스로 책도 잘 읽고요. 그런데 우리 애는 제가 일한다는 핑계로 너무 방치한 거 같아서 걱정이에요. 너무 늦은 건 아닌가 모르겠어요."

초등 1학년 아이가 책은 싫고 활동적인 놀이만 하려고 하는게 걱정이고, 다른 애들은 이미 책을 많이 읽은 거 같은데 우리 애는 뭐했나 싶은 불안감도 살짝 든다는 것이다. 늦은게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어서 전화했다는 초등 1학년 여덟 살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엄마의 이야기다.


독서 교실에 문의 전화를 하는 엄마들은 공통적으로 내 아이가 책을 읽기에 너무 늦은게 아닌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하곤 한다. 특히 아이가 첫 아이인데 초등 저학년이거나 아이가 하나인 경우에 어김없이 이런 말들을 하곤 한다. 충분히 이해되는 마음이다. 나도 아이가 어렸을 적 많이 불안해 봤고 많이 걱정해봤기 때문이다.



오후에 걸려온 또 한통의 전화, 이번엔 초등 5학년 엄마이다.


"저희 애는 운동만 좋아하고 아직까지 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어요. 애가 하고 싶다고 할때까지 기다려줬더니 이제 자기 입으로 OO가 다니는 독서교실에 다녀보고 싶다고 말하네요~"

오랜만에 들어본 이야기다. 요즘은 5학년 2학기가 될 때까지 학원을 가지 않고 운동만 하는 아이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초등 저학년부터 많은 학원을 쭉~ 다니는 아이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다니지 않는 아이를 만나는 것보다 쉬운게 사실이다. 그래서 아이를 독서교실에 보내고 싶어도 다른 학원 스케줄 때문에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아 못오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아직 학원을 안 다녀본 아이라니, 거기다 독서교실이 첫 학원이 될 것 같다니... 신기한(?) 일이다.




초등 1학년 엄마가 '우리 아이가 책 읽기에 늦은게 아니냐'고 걱정하며 전화하듯이 요즘 보통의 엄마들은 우리 아이기 지금 독서든 공부든 뭔가를 시작하기엔 늦어버린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많이 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걱정이라고는 전혀 없이 오히려 아이를 기다려줬다는 엄마. 육아서를 찢고 나온 엄마(육찢맘: 육아서를 찢고 나온 엄마, 만찢남을 떠올리며 내가 만든 말이다) 같다.


수없이 많은 육아서에서 '우리 아이의 때를 기다려줘야 한다'고 이야기 해도, 현실에 놓여진 엄마는 주변 엄마들의 이야기, 아이 친구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당장 뭔가를 하나라도 더 시키게 마련이다. 시키면서도 수없이 고민하고 흔들리긴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안하고 있자니 더 불안하고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너무나 무섭다.


그런데 아이의 때를 진짜 기다려줬고, 아이가 뭔가를 배워보고 싶으니 학원에 다녀보고 싶노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린 엄마라니 너무 보석같은 엄마를 만난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더 이야기를 나눠보니 5학년 딸 아이보다 이미 열 살이 많은 큰 아들을 키워본 경험이 있으셨고, 그 경험속에서 깨달은 것은 역시 기다림이었다고 했다. 또 공부라는 것이 늦은 때가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본인이 하고 싶다고 느끼는 때가 나타나 하려는 강단만 있다면 해낼거라고 하셨다. 자신이 그랬고(그래서 자기도 박사과정까지 공부했다고 하셨다), 자기 딸을 쭉 키워보니 충분히 아이가 하고 싶은게 생기면 뭐가 됐든 할거라고 믿는다고 하셨다.


목소리와 말투에서 느껴지는 연륜과 여유, 참으로 부러웠다. 나역시 5학년 딸아이를 키우고 있는 엄마이고 다년 간의 독서로 쌓인 지식과 성찰로 어느 정도는 중심이 잡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매일 매일 흔들리는 나의 진짜 모습을 나는 알기에, 나는 순간 아주 작아짐을 느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했고 어떤 학교에 어떤 전공을 했고 그래도....., 그런 모든 것들이 다 무색해지게 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실패와 도전의 경험을 통해 쌓아온 '아이와 삶을 바라보는 조급하지 않은 여유로운 태도'인 것 같다. 그 어떤 지식도 연륜을 뛰어넘기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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